오늘은 우리 교회가 지키는 추수감사절이다. 추수감사절에 우리는 아가서의 말씀을 본다. 그렇다면 아가서에는 어떤 은혜와 감사가 들어있는 것일까? 우리는 술람미 여인을 통하여 '은혜'라는 것이 무엇이며, 또한 '감사'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볼 수가 있다. 우리는 아가서의 말씀을 통하여 '은혜'와 '감사'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정확히 배울 수가 있는 것이다. 감사가 나로만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지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조차도 이 말씀은 우리를 바른 길로 안내해준다. 2021-10-24(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신부(39) 아가서강해(29) 술람미 여인과 나 너 그리고 우리들(아1;2,4;6,7;10~13)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BSaSWgrk8eQ [혹은 https://tv.naver.com/v/23166811 ]

 

1. 들어가며

  추수감사절은 기독교의 명절이다. 명절은 아무래도 풍성한 음식이 있어야 하고 축하 순서가 있어야 한다. 이스라엘에 있어서 명절 음식에는 빵과 포도주가 꼭 들어가며, 축하 순서에는 노래와 춤이 들어간다. 그런데 여기서 춤은 필수적인 요소는 아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도 추수감사예배 때에는 떡과 음식이 준비되는 것이고 특별 순서가 들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명절의 핵심 요소는 사실 '감사'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떤 경우에 감사를 하게 되는가? 특별히 아가서에 기록된 말씀 중에서 우리는 술람미 여인을 통하여 어떤 감사를 발견할 수 있을까? 그녀의 초기에 그녀에게서 '감사'는 발견되지 않는다. 하지만 솔로몬을 만나게 되면서 그녀에게도 드디어 감사가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나중에는 감사가 그녀의 생활이 되었다. 그렇다면 대체 그녀는 솔로몬을 만나 무슨 변화를 겪은 것인가? 오늘날 우리가 은혜를 받고 감사를 하기 위해서는 어떤 변화를 겪어야 하는 것인가? 감사에 대한 놀라운 비밀이 오늘 이 말씀 속에 들어 있다.

 

2. 아가서에서 술람미 여인은 어떤 변화를 겪게 되었는가?

  아가서에 나오는 술람미 여인의 처음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아가서의 첫 시작은 그녀의 요청으로 시작되는데, 그것은 솔로몬이 그녀에게 입맞춰주기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아가서 강해를 통해서 살펴보았지만 그녀의 요청은 실제 입맞춤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사랑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아가서 8:1에 보니, 그녀는 결혼한 후에도 쉽게 그와 입맞춤을 할 수 없다고 토로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찌되었든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이 자기를 사랑해 주기를 간절히 기대하고 바라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가 솔로몬과 연애를 하게 된다. 그리고 이어서 결혼을 하게 된다. 그런데 그녀가 점차 달라지기 시작한다. 결혼 전에 그녀는 오직 자기중심적으로 솔로몬이 다가오기를 원했다. 하지만 결혼한 후에 그녀의 관심은 이제 솔로몬의 것으로 향한다. 그래서 그가 일하고 있는 동산 곧 몰약 산과 유향의 산으로 그녀는 가겠노라고 결단을 한다(아4:6). 나 중심에서 너 중심으로 바뀐 것이다. 그리고 한 번 솔로몬과의 갈등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한 다음부터 그녀는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그것은 솔로몬이 하는 일을 계승하는 자 곧 그의 동역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처음에 자기중심적이었던 술람미 여인은 어떻게 되어서 솔로몬을 기쁘게 하는 삶 곧 이타적인 삶을 살게 되었으며, 결국에는 솔로몬과 같은 일을 하는 사람으로 변화된 것인가?

 

3. 술람미 여인을 달라지게 했던 세 가지 사건은 무엇이었는가?

  그렇다면 처음에 자기중심적인 사람이었던 술람미 여인은 대체 어떤 일을 겪으면서 이타적인 삶으로 바뀌게 된 것인가? 그것은 그녀에게 일어난 3가지 사건이 그 핵심에 있다. 첫째는 솔로몬이 그녀에게 다가온 사건 때문이었다. 사실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이 가지고 있는 여러 포도밭 중 하나를 세로 받아서 그것을 경작하고 있는 시골 처녀에 불과했다. 그런데 어느 날 왕궁에 있어야 할 솔로몬이 바알하몬에 있는 그 포도원으로 내려온 것이다. 그리하여 그녀가 비로소 솔로몬을 만나게 된다. 나중에는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의 아내가 되는데, 그녀가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사실 술람미 여인의 능력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왕이 자신의 보좌에서 내려왔고 또한 포도원을 방문한 사건으로 인하여 발생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연애 시절에 솔로몬이 그녀를 데리고 간 잔치집 때문이었다. 보좌에서 내려와 시골에 도착한 솔로몬은 술람미 여인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그리하여 연애를 시작한다. 그런데 연애 시절에 솔로몬은 딱 한 번 그녀를 어떤 장소에 데리고 간다. 그런데 그곳은 잔치집이었다(아2:4). 하지만 잔치집에서 그가 그녀에게 보여준 것은 그의 사랑의 깃발이었다. 그것은 그가 장차 어떻게 그녀를 사랑할 것인지를 예시해 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곳은 실제는 '잔치집'이 이나라 정확히는 '포도주의 집'이었다. 그렇다면 왜 솔로몬은 그녀를 포도주의 집으로 데려간 것일까? 그것은 아가서의 해설서인 요한복음을 알면 금방 이해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2장에 보니, 잔치집이 등장하고 거기에서 포도주가 떨어진 사건이 나오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포도주는 장차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고귀한 피를 의미한다(요2:3~4). 그렇다. 솔로몬이 그날 그녀를 데려간 장소와 그가 그녀에게 보여 준 사랑의 증표는 그녀를 위해 그가 피흘려 죽을 것이라는 증표였던 것이다. 그렇다. 주님께서도 무명의 별 볼일 없는 우리 인간들을 사랑하시고 선택하신 후, 우리를 당신의 아내가 되게 하시려고 기꺼이 대속의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셋째는 결혼 후 솔로몬을 다시 찾은 장소 때문이었다. 결혼 후 어느 날 솔로몬이 밤늦게 집에 들어온 일이 있었다. 그리고 그때 그가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술람미 여인은 그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아마도 솔로몬이 다른 여자의 품에 있다가 새벽녘에 온 것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고로 그녀는 여러 핑계를 대면서 그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그러자 문틈으로 그가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그 문틈으로 들어온 신랑의 손에서 그만 몰약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왜 솔로몬의 손에서 몰약이 떨어지고 있었는가? 그것은 작가가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거기에 집어넣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몰약'이란 사람이 죽으면 시체를 바르는 향품을 가리킨다. 요한복음을 읽어 보라. 거기에 보면 니고데모가 몰약과 침향을 가지고 온다. 그것은 예수님의 시체에 바르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전에는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진 여인이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몸에 부은 사건이 있었다. 주님은 그때 그 옥합을 허비했다고 책망하는 제자들을 향하여서, 그녀가 행한 일은 누구도 준비해 주지 않은 자신의 장례를 위하여 그녀가 행한 고귀한 일이라고 하셨다. 그렇다. 그때 솔로몬의 손에서 몰약이 떨어진 것은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을 보여 준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손은 못 박힌 손을 예표한 것이다. 그런데 그날 그녀는 자신을 고된 노예 생활에서 해방시켜 주기 위하여 죽었던 그분을 모른 체 했던 것이다. 그러자 회개하고 곧장 일어나 문을 열어 주지만 남편은 이미 가고 없었다. 그러자 이제 비로소 정신을 차린 술람미 여인은 자신의 남편을 찾아 그 밤에 홀로 길을 떠난다. 심지어 성안에 있는 순찰자들에게 모욕을 당하지만 찾지 못한다. 그러자 그녀는 성밖과 연결되는 성벽에까지 가 보았지만 찾지 못한다. 그리고 파수꾼들에게 자신의 겉옷마저 빼앗기고 만다. 그래도 남편을 찾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던 술람미 여인은 드디어 아침이 되어서야 남편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는 성바깥에 있는 동산에서 양 떼를 치고 있었다. 거기에서 솔로몬은 백합화 가운데 양 떼를 치고 있었으며, 꺾어진 백합화를 줍고 있었다. 이것도 사실은 매우 상징적인 묘사다. 양 떼는 이 땅에서 살고 있지만 장차 하나님의 자녀가 될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이고, 백합화는 정결하고 거룩하고 정절로 단장한 신부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렇다. 술람미 여인은 오해했던 것이다. 남편이 그날 밤 늦게 집에 들어온 이유를 오해한 것이다. 그리고 비로소 알게 된다. 그것은 그분은 장차 천국에 들어올 양 떼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 불철주야 일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것은 마치 양 일 백마리 중에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을 찾아 횃불을 들고 산과 들을 헤매는 목자의 모습과 같다(눅15:4). 주님은 이미 자신의 아내가 되어 하늘의 성 새 예루살렘 안에 들어와 있는 성도보다 이 땅에 살고 있는 양 떼들과 백합화들에게 관심이 많으셨던 것이다. 그러자 그녀는 그때부터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남편의 일을 돕게 된다. 그래서 자기도 이제 포도원을 가꾸어 과실나무를 심고 가꾸며 양 떼들을 돌보는 일을 시작한 것이다. 

 

4. 술람미 여인의 감사는 비로소 어떻게 해서 시작되었는가?

  술람미 여인도 처음에는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살고 있었다. 자기만 잘 되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그녀는 자기중심적인 삶을 탈피하게 되고, 그분을 위한 삶으로 바뀌게 된다. 그러다가 한 번 남편과의 갈등 이후에 신랑을 되찾은 다음부터는 오직 신랑의 동역자가 된다. 그때부터 그녀도 역시 평안한 궁중의 삶을 버리고 스스로 포도원을 가꾸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녀가 그렇게 된 데에는 그녀에게 보이지 않는 감사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녀가 그렇게 변하기까지는 자신의 노력이나 수고만이 아닌 다른 것이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 그녀가 솔로몬의 선택을 받아 왕후가 된 것은 그녀가 잘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왕의 보좌에서 내려와 직접 시골 촌구석까지 방문했던 그분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녀의 첫 번째 감사는 시골까지 내려와서 수많은 사람들 중에 자신을 아내로 선택해 준 솔로몬에 대한 감사였던 것이다. 

  둘째, 솔로몬이 자신을 아내로 취하기까지는 엄청난 희생이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자기가 솔로몬의 눈에 그냥 들어서 선택된 줄 알았다. 하지만 솔로몬이 그녀를 데려간 장소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인류의 죄를 속량하기 위해 피흘려 죽을 골고다 언덕이었고, 그가 밤늦게 집에 들어오게 된 것은 다른 여자들과 있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갈 길을 몰라 방황하는 양 떼들을 인도하고 먹이기 위함이었으며, 주님께 순결을 바친 사람들을 천국으로 데려오기 위함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기를 위해 기꺼이 십자가의 죽음을 선택한 그분에게 감사하지 아니할 수 없었던 것이다. 

  셋째, 자기가 과거에 청혼한 솔로몬을 쉽게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자기가 열심히 노력한 댓가만이 아니라 실은 그녀의 어머니의 기도와 땀방울 때문이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녀가 결혼 후에 신랑을 놓쳐버린 후에 다시 찾기까지의 과정을 통해서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기도는 일종의 저축과 같은 것이다. 필요할 때에 인출해서 쓸 수 있는 것이 기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가 초기에 솔로몬의 청혼을 받아들여 잠시 예루살렘에 있는 임시 거처에 있을 때에 일어났다. 며칠을 기다려도 솔로몬을 만날 수 없자, 그녀는 밤에 혼자 솔로몬을 찾아 나서게 된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때는 쉽게 솔로몬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의 간절한 염원이나 그녀의 수고 때문만이 아니었음을 나중에 깨닫는다. 그녀를 위해 누군가가 기도하고 땀방울을 흘렸기 때문에 쉽게 만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런데 결혼한 후 두 번째로 남편을 잃어버렸을 때에는 이전에 쌓여 있던 기도를 다 써 버린 후였기 때문에 이제는 그녀는 기도가 필요했다. 그러므로 그녀는 그때 비로소 철야기도와 회개의 제단을 쌓아야 했던 것이다. 그 기도를 통해 결국 그녀도 남편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5. '은혜'와 '감사'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은혜'와 '감사'란 대체 무엇인가? 먼저, '은혜'가 무엇인지부터 오늘 말씀을 통해 정리해 보자. 사실 '은혜'란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이라는 뜻이다. 내가 수고하고 노력하지 않았는데도 나에게 값없이 좋은 것들이 주어짐을 가리킨다. 그런데 아가서의 말씀을 통하여 보면,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의 왕후가 되었고 그녀가 달라지게 된 이유를 살펴보면, 순전히 은혜 때문이었는데, 그 은혜는 결단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솔로몬의 낮아짐과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어머니의 기도와 땀방울의 결과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한 혜택이 그녀에게 주어진 것을 두고 '은혜'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감사'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자신이 지금 은혜를 누리고 살고 있는 것이 자신만의 노력과 수고로 된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기도와 땀방울과 희생 때문에 나 자신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에 비로소 자연스럽게 나오는 탄성이 '감사'인 것이다. "주여, 감사합니다"라고 말이다. 

 

6. 나오며

  예수님의 낮아지심과 희생 그리고 누군가의 기도가 아니었다면 우리 중 누구도 죄와 죽음과 사탄 마귀의 포로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며, 여전히 고된 인생의 노동에 시달리다가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직접 사람이 되시어 이 땅에 오시었고, 우리 인생들의 현장들을 직접 심방하시더니 결국 우리를 건져내기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중에 너와 나는 주님의 거룩한 신부 곧 백합화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날 당신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자신을 위한 기도만해도 빠듯한 시간이었지만, 겟세마네 동산에서 베드로와 제자들을 위해서도 기도해 주셨다. 그렇다. 주님의 그러한 기도 때문에 위대한 베드로 사도가 나온 것이다. 그 기도로 인해 베드로가 은혜를 받은 것이다. 그런데 그 은혜는 베드로에게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예수께서 댓가를 지불하심으로 인하여 그에게 주어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오늘날 내가 순탄한 길을 가고 있는 것은 나 때문이 아니다. 누군가의 희생과 섬김과 기도가 있어서였다. 특히 나를 낳아 주시고 길러 주신 내 부모와 조부모 그리고 가족들 그리고 친구들의 기도와 헌신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야할 길이 무엇인가? 그것은 내가 받은 은혜에 나도 보답하는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그것을 행하는 자가 있다면 우리의 후손들 중에 은혜를 받는 자가 나올 것이다. 그리고 그 은혜가 거져 주어진 것이 아님을 그도 알게 될 때에 비로소 그의 입술에서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나올 것이다.

 

2021년 10월 24일(주일)

정병진목사

 

열 명의 문둥병자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자 곧 그들을 불치병에서 깨끗이 나음을 입었다. 하지만 자신이 불치병으로부터 나은 것을 알았을 때, 큰 소리로 하나님께 감사드렸을 뿐만 아니라 돌아가 예수께서 엎드려 경배하면서 감사를 드렸던 한 명의 나병환자가 있었다. 그는 사마리아 출신의 나병환자였다. 그렇다면 나머지 9명의 나병환자는 왜 사마리아 나병환자처럼 감사를 표현하지 않았던 것인가? 아마도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9명의 나병환자가 감사하지 않았던 3가지 가능성이 무엇인지를 찾아보면서 우리는 과연 어떤 자가 되어서 복받는 자가 될 수 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2019-10-25(금) 금요기도회
제목: 왜 9명의 나병환자는 감사하지 않았을까?(눅17:1~19)
https://youtu.be/Rt41LNWI5SM


1. 들어가며

  예수께서 이제 마지막의 예루살렘 입성을 앞 두고 있는 어느날 갈릴리와 사마리아 지역에 위치한 어느 마을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예수께서는 자신을 고쳐달라고 부르짖는 10명의 나병환자를 보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가서 자신의 몸을 제사장에 보이라고 하셨다. 그런데 그중에 한 명은 길을 가다가 자기가 나은 줄 알고는 예수께 돌아가서 그분께 엎드려 경배하고 감사했다. 하지만 나머지 9명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왜 불치병에서 치유받았던 9명의 나병환자는 예수께 돌아가 감사하지 않았던 것인가? 그들에게는 감사할 수 없는 어떤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던 것인가? 아니면 감사할 마음이 없었던 것인가?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비록 불치병에서 나았지만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하지 않았던 9명의 나병환자에게 대해 살펴봄으로서 우리에게는 이러한 요소가 없는지를 돌아보고자 한다.

 

2. 감사란 대체 무엇이며, 왜 감사해야 하며 그리고 어떻게 감사하는 것인가?

 

1)감사의 정의

  감사란 무엇인가? 감사란 받은 은혜가 있을 때에 자기에게 은혜를 끼친 분에게 보답하는 마음과 행위를 일컫는 말이다.

 

2)감사해야 하는 3가지 이유

  그렇다면 왜 감사해야 하는가? 그것은 받은 은혜가 있기 때문이다. 내 능력과 힘으로는 도무지 행할 수 없거나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을 맛본 자는 감사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눅17:121~19에 나오는 열 명의 나병환자의 치유사건을 통해서 왜 감사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가? 그것은 3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행위이기 때문이다(눅17:18). 그러므로 감사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한 것에 대한 반응이다. 둘째, 감사는 이미 자신이 받은 은혜를 영원히 내 것이 되게 인치는 거룩한 행위다(눅17:17~18). 다시 말해, 감사는 이미 받은 은혜가 영원히 내 것이 되도록 완전히 도장찍는 행위인 것이다. 그러므로 감사할 때에 이미 받은 은혜는 확고하게 내 것이 되는 것이다. 셋째, 이미 받은 은혜 위에 또 다른 은혜가 오도록 씨앗을 뿌리는 행위다(눅17:19).

  결국 9명의 나병환자들이 감사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이 정말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고 말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이 감사를 하지 않는 것은 죄는 아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불이익이 주어지는 것도 없다. 하지만 사람은 감사를 통해서 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기회를 확보할 수 있다. 그리고 사람은 감사함으로써 이미 맏은 은혜를 완전히 자신의 것이 되게 할 수 있으며, 다음에 받을 축복에 대한 씨앗을 뿌리는 기초가 된다.

 

3)감사하는 3가지 방법

  그렇다면 사람은 어떻게 감사할 수 있는가? 가장 기본은 "진실된 마음으로" 하면 된다. 그리고 더불어 3가지 방법으로 우리는 감사할 수 있다. 첫째, 감사함을 입술로 표현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는 그분이 나에게 해 주신 일에 대해서 간증하고 찬양하는 것이다. 이것은 주님께 감사의 예물을 바치고 싶지만 드릴 것이 없을 때 행하는 감사행위다. 둘째, 자기에게 무엇인가를 드릴 수 있을 경우의 감사가 있다. 그때에 농부들은 자기가 농사지은 것으로 감사하면 되고, 매달 월급을 받는 이들은 자신의 수입 중에서 하나님께 감사의 예물을 올릴 수 있다. 하지만 입술로 고백하는 감사로서는 부족하고, 그렇다고 드릴 것은 없는 이는 세번째 방법을 사용하면 된다. 셋째, 자신의 몸을 드려 주님의 몸된 교회를 봉사하거나, 자신이 가진 은사와 달란트를 복음전파와 주의 몸된 교회를 위해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3가지 방법 중에서 어떤 것을 쓴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잘못 되었다고 나무라지 않으신다. 모두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다양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3. 왜 9명의 나병환자는 예수께서 돌아가서 감사하지 않았을까?

  불치병이라는 나병에서 고침받았지만 왜 9명의 나병환자들은 예수께 돌아가서 감사하지 않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정확히 성경말씀에 나와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소한 다음과 같은 3가지의 경우를 상정해볼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이 3가지의 경우의 수에 걸려있지만 우리는 감사하는 작 받을 수 있는 특별한 복을 놓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감사하지 못했던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첫째, 자기에게 일어난 치유의 기적은 자기의 노력의 산물이었다고 생각했었을 수 있다. 즉 그들은 자기의 믿음으로 자신이 나았다는 생각을 했기에 굳이 예수님께서 찾아가 감사해야 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그들의 기적적인 치유의 시작은 무엇에서부터였는가? 그들의 믿음이었는가? 예수님의 선언(명령) 때문이었는가? 사실 10명의 나병환자가 치유받은 것은 2가지가 함께 있었다. 예수님의 선언(명령)이 먼저 있었고, 그들의 믿음에 따른 순종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치유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예수님 때문이다. 만약 그것이 아니었다면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자신의 믿음으로 치유받았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들의 치유의 근본과 시작은 예수님에게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기가 기적을 체험하는 가장 중요하고도 핵심적인 이유가 자신의 믿음이라고 착각했을 수 있다.

  둘째, 그들은 나중에 감사하려고 했는데, 그때가 아직 안 되었던 것이다. 즉 9명의 나병환자는 자신이 치유받은 사실을 제사장에게 보여주어 확실히 나았다는 선언을 들은 후에 예수께 돌아가서 감사하려고 했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당장 감사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감사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감사는 은혜를 받았드면 그 즉시해야 하는 것이 감사다. 시간이 지나면 감사하고픈 마음도 같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까워서도 감사할 수 없다. 그러므로 감사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 순간을 결코 놓쳐서는 아니 된다. 사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물질은 언제나 부족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물질이 많아서 그리고 넉넉해서 감사하는 것이 아니다. 감사하는 이유가 발생했을 때 즉시 하는 것이 감사의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감사는 너무 늦은 시기로 잡지 말라. 기왕이면 감사할 사건이 발생했을 때 즉시 실천하는 것이 좋다. 그때에는 정말 감사하고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께 감사의 예물을 드릴 수가 있기 때문이다.

  셋째, 그들이 주님께 가서 감사를 하려고 한다 할지라도 그들의 수중에게는 드릴 것이 없는데 어떻게 감사할 수 있겠느냐면서 스스로 포기해버렸을 가능성이 있다. 사실 그들은 이때껏 나병환자로 살아온 자들이다. 그들은 이미 동네사람들과 겪리 분리 조치되어 저주받은 환자처럼 취급 받으면서 살아온 자들이다. 그런데 그들이 나병에서 고침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그들이 주님께 바칠 수 있는 것은 사실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주님의 마음은 다르다. 고후8:12의 말씀처럼, 할 마음만 있으면 [그 마음이] 있는대로 받으실 분이 주님이시다. 그리고 주님은 없는 것은 받지 아니하시는 분이시다(고후8:12). 그러므로 자기가 가진 것이 없다고 감사를 미루거나 감사를 놓치지 말라. 감사는 하나님께 영광돌릴 기회와 이미 받은 복을 인치는 행위로, 차기에 받을 은혜를 위한 씨뿌림이기 때문이다. 정 드릴 것이 없으면, 큰 소리로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그분이 행하신 일을 찬양으로 표출하라. 그렇게하도 할 때에 우리는 감사하는 자가 받게 될 축복을 놓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4. 나오며

  사도바울은 A.D.55년 어느날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물질을 바치는 문제에 있어서 이러한 말을 한 적이 있다. "각각 그 마음에 [이미] [작]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서 억지로나(강제로나) 하지 말지니, [왜냐하면] 하나님은 즐겨(즐겁게) 내는 자를 사랑(아가파오) 하시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감사할 일이 생기면 감사를 통하여 감사의 복이 영원히 우리의 것이 되기를 진짜 바라신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가 받은 이후에도 그것이 영원히 우리의 것이 되기를 바라신다. 그렇게 하려면 우리는 늘 감사하는 습관을 가질 필요가 있다. 감사하는 자가 더 많이 감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19년 10월 25일(금)

정병진목사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