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0-02(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신앙의 대상을 하나님으로 바꾸었을 때 베풀어지는 놀라운 은혜(수2:1~15)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ofjMIS9-PLc  [혹은 https://tv.naver.com/v/29634973 ]

 

1. 들어가며

  설교의 주제는 크게 두 종류가 있을 것이다. 하나는 회개와 순종을 강조하는 설교다. 그리고 또 하나는 사랑과 은혜를 강조하는 설교다. 오늘은 이것들 중에서 은혜와 긍휼을 강조하는 말씀을 정해 보았다. 사실 신약성경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역시 '은혜'라고 할 수 있다. 값없이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을 보통 '은혜'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구약성경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인애(인자)'일 것이다. 히브리어로는 '헤쎄드'이다. 헤쎄드는 '인애, 인자, 자비, 긍휼, 친절, 호의' 등으로 번역되는 단어인데, 이것이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의 제일 큰 속성의 하나로 등장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약성경을 읽을 때마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그 인자하심(헤쎄드)이 영원하다는 말씀을 자주 듣게 된다(시105:5,59:17). 그리고 오늘 말씀에도 등장하고 있다(수2:12). 왜냐하면 하나님은 원래가 자비를 베풀어주시는 분이시고 긍휼하심이 풍성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 가운데 이방인이었다가 헤쎄드의 은혜를 받았던 사람은 대체 누구였을까? 우리는 그러한 사람의 하나로서, 여리고성의 기생 라합을 들 수 있다. 그래서 오늘은 기생 라합의 생애에 나타난 헤쎄드의 은혜를 나누어보려고 한다. 그렇다면 기생 라합은 과연 어떤 하나님의 헤쎄드의 은혜를 받은 것일까? 그리고 그녀가 헤쎄드의 은혜를 받게 된 이유는 대체 무엇이었던 것일까? 

 

2. 기생 라합은 어떤 여인이었을까?

  사람에게는 별명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라합에게도 별명이 있었으니, 그녀의 이름 앞에 꼭 '기생'이라는 말이 붙어다닌다는 것이다. 구약성경에서 '라합'이라는 사람은 '여호수아서'에서만 나오는 이름이다. 그리고 신약성경에서는 라합이라는 이름이 세 군데에 걸쳐서 나오는데, 하나는 마태복음 1장(마1:5)에 나오고 이어서 히브리서 11장(히11:31)과 야고보서 2장(약2:25)에도 나온다. 그런데 히브리서와 야고보서에서는 라합이라는 여인의 이름 앞에 별명이 붙혀져 있다. 그것은 '기생'이라는 것이다. 그럼 '기생'이라는 단어는 어떤 뜻인가? 이것을 히브리어나 헬라어로 보면, '창녀'라고 되어 있다. 왜 그녀에게는 '창녀'라는 별명이 붙어다니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그녀가 구약시대의 사람으로서 가나안 땅의 이방여인이었고 좋지 않은 신분을 가진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행동을 통해 메시야의 조상에 그녀의 이름을 올려놓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유대 랍비들은 그녀를 어떤 여인으로 보고 있을까? 그들은 하나같이 그녀를 창녀로 보지 않는다. 여관집 주인으로 본다. 왜냐하면 수2:1의 말씀에 따르면, 가나안 땅을 정탐하러 떠났던 두 명의 정탐꾼이 그녀의 집 안으로 들어가 묵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두 명의 정탐꾼이 그 중요한 순간에 쾌락을 즐기기 위해 창녀의 집에 들어갔을 리가 없을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조심스럽게 그녀의 집이 아마 여관집이 아니었을까 추측해 본다. 왜냐하면 그녀가 여관집을 운영했기에 가나안 땅 근방에서 일어나고 있는 소식을 다 들어서 알고 있었을 것이요, 자기의 가족들에게도 신임을 얻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녀의 집에 정탐꾼들이 묵으러 들어온 것이다. 

 

3. 라합은 정탐꾼들을 어떻게 대우했을까?

  당시에 여리고 성은 외지에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때면 반드시 들러서 가야하는 길목에 위치해 있다. 그러므로 다른 어떤 곳보다도 여관업이 성행했다. 그런데 라합 당시에 여리고 성은 아주 긴장하고 있는 상태였다. 왜냐하면 질풍노도처럼 밀려오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정복 소식을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 성에 들어오는 사람을 면밀히 살피고 있었다. 그런데 그 성이 외인 두 사람이 들어왔다. 이 소식은 금새 왕에게 들어갔고 왕은 사람들을 라합의 집에 보낸다. 그들은 기생 라합의 집을 찾아와서는 "그들을 끌어내라"고 명령하였다. 하지만 기생 라합은 시치미를 뚝 떼고 그러한 사람이 온 것까지는 맞으나 해가 지기 전에 성문을 통해 빠져나갔으니 빨리 좇아가면 그들을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그런데 사실은 정탐꾼들을 자신의 옥상 위에 있는 삼대 속에 숨겨놓은 후였다. 병사들이 그를 추격하러 떠나자 그녀는 정탐꾼들이 잠들기 전에 올라가서 자신과 자신의 가족의 미래를 부탁했고 그들을 안전하게 창문을 통해 밖으로 탈출하도록 도와주었다. 왜냐하면 그녀의 집이 성벽 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추격자들을 따돌리기 위해 3일동안 피해있을 장소까지 알려주고 먹을 것도 준비해 주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정탐꾼 두 명은 안전하게 여호수아의 진영으로 복귀하게 된다. 

 

4. 왜 기생 라합은 정탐꾼들을 숨겨주기로 결정한 것인가?

  자기 집에 손님으로 들어온 두 사람이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녀는 매우 고민했을 것이다. 첩자가 자기 집에 들어왔다고 왕에게 보고할 것인가에 말 것인가 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신중하게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녀가 그동안 남들로 들어왔던 소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이들을 과연 왕에게 고발해야 할 것인지 아니면 이들을 숨겨주어야 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했다. 추격자들을 성밖으로 내 보낸 후, 그녀는 옥상에 있는 그들을 찾아가 그들에게 자신의 속내를 밝힌다(수2:9~11). 그것은 왜 그들을 숨겨주고 있는지를 그들에게 말한 것이다. 첫째, 여호와께서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에 게 주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벌써 이스라엘 백성들이 섬기는 신의 이름이 누군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역사는 어떻게 진행될 것인를 정확히 예측하고 있었다. 둘째, 여호와가 어떤 분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분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때에 거대한 홍해물을 마르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요단 저쪽에 있는 거인족의 두 왕들 곧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을 전멸시켰다는 소식도 들어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하나님을 제저할 수 있는 가나안 민족은 없다고 내다보았다. 셋째, 라합은 오직 여호와만이 하늘과 땅 사이에 존재하는 최고의 신이라고 보고 있었다. 그녀가 여호와 하나님을 알기 전에 무신론자로 살았었는지 혹은 가나안의 어떤 신을 섬기고 살았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녀의 마음 속에는 이미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 신이라는 신앙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두 사람이 자기 집에 들어온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그녀는 생각했을 것이다. 장차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멸망을 피하기 위해서는 정탐꾼으로 찾아온 두 명을 안전하게 숨겨주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다가 혹시 발각되더라도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와 함께 정탐꾼들을 숨겨주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러다다 자신과 자신의 가족의 목숨이 경각간에 달린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부탁을 한다. 자신이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었으니 장차 이스라엘 민족이 여리고 성을 정복하러 올 때에, 자기와 자기의 부모와 형제들도 살려달라고 말이다. 

 

5. 기생 라합으로 굳은 결단으로 인해 결국 어떻게 되었는가?

  정탐꾼들이 안전하게 돌아간 뒤 여호수아는 군대를 이끌고 여리고 성을 정복하러 쳐들어간다. 그러나 가나안 전쟁의 첫 번째 전투인 만큼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시키신 방법대로 전쟁을 한다. 여리고성을 날마다 돌면서 일주일을 보낸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는 일곱 바퀴를 돈 후 함성을 질렀다. 그러자 성이 안쪽으로 와르르 무너졌다. 그런데 기생 라합과 그 집안에 있던 가족들과 무려 친족들까지 살아남았다. 왜냐하면 정탐꾼들과 약조하기를 그 집에 빨간 줄을 매달아놓으면 그 집안 사람들을 살려주기로 약조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을 칠 때에 두 명의 정탐꾼들을 보낸다. 그래서 빨간 줄이 쳐져 있는 그녀의 집안에 있는 사람들을 이스라엘 진영으로 데려다 놓는다. 그리고 성 안의 모든 사람들을 쳤다. 그때의 전쟁은 사실 '헤렘'전쟁이었다. 생명있는 것이라면 사람이든지 동물이든지 무론하고 다 죽이는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여리고 성 사람들이 다 죽던 그 마당에 오직 기생 라합과 그 집안에 있는 가족들 그리고 그녀의 친족들만 살아남게 된다. 그런데 그녀가 받은 축복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정탐꾼들의 한 명으로 추정되는 유다 지파의 사람 살몬과 결혼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녀가 아들을 낳게 되는데, 그 아이가 바로 룻기서의 주인공은 '보아스'다. 보아스는 다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았으며, 이새가 다윗왕을 낳았으니(마1:5), 그녀는 다윗왕의 고조 할머니가 되었고, 메시야이신 예수님의 직계조상이 된 것이다. 그렇다. 그녀는 자신과 자신의 가족의 목숨만을 구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유다 지파의 조상이 되었고, 메시야의 조상이 되는 큰 축복을 받게 된 것이다. 

 

6. 그녀가 그때 행한 말은 거짓말이었는가 그녀의 기지였는가?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정탐꾼들을 살리기 위해 그들을 잡으러 왔던 자들에게 그녀가 한 거짓말이다. 그것은 그녀가 기지를 발휘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거짓말 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녀가 했던 거짓말의 죄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성경에서는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분명하게 나와 있다. 그것도 십계명의 아홉번째 계명으로 떡 하니 규정되어 있다(출20:6). 그리고 신약성경에는 거짓말하지 말라는 규정으로 끝나지 않는다. 거짓말을 하는 자는 불못에 던져지게 될 것이고, 새 예루살렘 성 안으로 못 들어가게 되며, 성밖에 있을 것이라고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계21:8,27,22;15). 그렇다. 거짓말하는 죄는 지옥형벌을 면치 못하는 죄에 해당하는 것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아마도 하나님을 대적하던 마귀의 제일 속성이 거짓말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왜냐하면 아담과 하와를 속였던 말이 사탄마귀의 거짓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녀가 행한 거짓말의 죄는 작은 죄가 아니었다. 큰 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약성경의 기자들은 그녀를 '믿음의 여인'이라고 규정하고 있으며(히11:31), 그녀의 행동을 의로운 행동이라고 평가하고 있다(약2:25). 대체 어찌되었길래 그녀가 했던 거짓말의 죄는 어디로 사라져버리고 그녀를 믿음의 여인이라고 평가하는 것인가?

  

7. 기생 라합은 어떻게 되어서 헤쎄드의 은혜를 입게 되었을까?

  우리는 여호수아 2장의 말씀을 통해서 그녀가 정탐꾼들을 살리기 위해서 분명하게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녀가 한 거짓말의 죄를 일단 덮어두셨다. 그것은 그녀가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일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녀가 모든 신들 중에 여호와를 자기의 하나님으로 믿는 신앙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여호와를 자신의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을 수도 있었으나 기꺼이 스스로 하나님을 자기의 신앙의 대상으로 정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매우 기뻐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가 행한 거짓말의 죄는 그냥 간과해주신 것이다. 그녀가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야말로 너무나 큰 중대한 결정이라고 하나님께서는 보시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혹은 예수님)을 자신의 신앙의 대상으로 결정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그것은 하나님, 지금으로 말하면 예수님을 자신의 신앙의 대상으로 결정할 때에 그 전에 지었던 모든 죄를 간과하심으로 용서해주시는 것이다. 너무나 중대한 결정을 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기 인생의 주인이자 주권자를 하나님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오늘날에도 역시 사람은 예수님을 믿기 전의 사람과 믿은 후의 사람뿐인 것이다. 예수님을 믿기로 결정했다는 것은 자신의 인생의 주인을 자신에게서 예수님으로 이동시켰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전에 그가 어떤 죄를 지었든지 상관없이 그 죄를 눈감아주시는 것이다. 그때에 그는 이제 죄가 없다고 하늘에서 선언해주시는 것이다. 그리하여 여호와께서는 그녀가 여호와 하나님을 자신의 신으로 믿기로 결정한 것을 크게 보시고 그녀가 지었던 거짓말의 죄를 눈감아주셨던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자비의 은혜' 곧 '헤쎄드의 은혜'라고 부르는 것이다. 

  사실 신약성경에서도 처음으로 예수님을 믿게 되면 그 사람이 자신이 예수님을 믿기 전에 지었던 낱낱의 죄를 다 회개하지 않아도 그를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주신다고 약속하고 있다(엡1:7, 벧전1:18~19). 처음으로 예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섬기기로 결단하게 되면 골고다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로 그 사람이 지었던 죄를 덮어버리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인들이 지금도 예수님을 믿음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는 것이다. 만약 예수 믿기 전에 지었던 모든 죄를 다 회개해야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에 들어간다면 이 세상 사람 중에 그렇게 해서 천국에 들어갈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행동으로 지은 죄 뿐만 아니라 말과 마음으로 지은 죄가 얼마나 되는지 가늠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과거에 어떤 죄를 지었더라도 그 사람이 예순미을 믿기로 결정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전에 지었던 죄들은 용서해주시는 것이다. 여기서 '용서해주신다'는 말은 '없는 셈으로 쳐주신다. 없다고 선언하신다'는 뜻이다. 그 죄가 있기는 있지만 그 죄를 거론하지 않으시겠다는 뜻이다. 그 죄가 천국에 들어가는데 문제가 되게 하지는 않겠다는 뜻이다. 이것은 구약시대에 보아스의 아내가 되었던 모압 이방여인이었던 룻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그녀의 민족이 섬기고 있던 그모스를 버렸다. 그리고 시어머니 나오미를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시아버지가 죽고 남편도 죽고 아주버니도 죽었다. 그러자 시어머니는 다시 자기 민족으로 돌아가서 재가해서 살라고 했다. 하지만 시어머니를 따라가면 평생 과부로 시어머니를 공양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그녀는 시어머니를 따라갔다. 그것은 자신의 시어머니의 하나님을 믿고 따르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여호와 하나님의 날개의 그늘 아래 들어온 그녀를 어여삐 보셨다. 그래서 믿음 좋은 보아스를 만나서 결혼하게 해 주신 것이다. 그렇다. 여호와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섬기는 자는 자비의 은혜 곧 헤쎄드의 은혜를 입게 되는 것이다. 

 

8. 기생 라합이 입게 된 두번째 헤쎄드의 은혜는 무엇이었는가?

  그런데 기생 라합이 여호와 하나님만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섬기기로 결정한 것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녀의 결단을 매우 귀하게 보시고 그녀가 바라고 원하는 일들까지 덤으로 허락해주시었다. 그것은 여리고 성 사람들이 다 진멸되는 상황에서도 ,그녀의 부모와 남녀 형제들 심지어 그녀의 친족들까지도 다 살아남아 구원받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수6:23). 그렇다. 누군가가 최초로 하나님 혹은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면, 하나님께서는 최초로 예수믿는 그 사람 때문에 그 사람의 가족들까지도 구원받을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자신의 신앙의 대상으로 선택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두번째 헤쎄드의 은혜인 것이다. 처음으로 예수님을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모신 자들은 이처럼 특별한 은총을 주어진다. 그러므로 신약시대에 이방인이었던 로마 장교 고넬료도 자신이 예수님을 자신의 신앙의 대상으로 받아들이게 되자, 자기와 자기의 집안 식구와 그리고 그때 함께 그 집에서 복음을 들었던 자신의 친족들과 가까운 친구들까지도 다 구원받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행10:2,24,44~46). 그것은 고넬료 뿐만 아니다. 사도 바울도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지만 그때 간수에게 전도할 기회가 있을 때에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당신은 주 예수를 믿으십시오. 그리하면 당신과 당신의 집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행16:31)"라고 외쳤던 것이다. 그리하여 간수가 예수님을 믿게 되자 자기와 자기의 가족들이 다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아 최초로 빌립보에도 교회가 탄생하게 된다(행16:31~34). 그렇다. 처음으로 예수님을 자신의 신앙의 대상으로 받아들인 자에게는 자신의 가족도 구원받을 수 있는 특별한 은혜를 허락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기생 라합처럼 하나님을 선택하는 자들이 받을 수 있는 두번째의 헤쎄드의 은혜인 것이다. 

 

9. 나오며

  우리 교회처럼 회개를 외치면서, 회개 없이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하니까, 어떤 분들은 회개하지 않은 한 개의 죄라도 남아있다면 그 사람은 구원을 못받는 것이 아니냐고 질문하는 이들이 더러 있다. 하지만 이것은 헤쎄드의 은혜를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왜냐하면 처음으로 예수님을 자신의 신앙의 대상으로 받아들이는 자는 그가 예수 믿기 전에 지었던 죄들이라도 다 용서받게 된다는 것을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너무나 귀하고 또한 중대한 일이기 때문에 그 전에 지었던 죄들을 하나님께서도 눈감아주시는 것이다. 그래야 죄인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고 천국에도 들어갈 수 있는 것이지, 예수 믿기 전에 지었던 과거의 모든 죄들을 낱낱이 다 자백해야만 용서받고 천국에 들어간다고 한다면 천국에 들어갈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회개도 평소 때 늘 하나님께 회개를 해 오던 자가 마지막 죽는 순간에 그동안 회개하지 못해 남아있던 죄들도 다 용서받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지, 평소 때에는 한 번도 회개하지 않다가 그날 죽을 때에 "하나님, 지금까지 지었던 모든 죄를 용서해주세요"라고 기도한다고 해서 헤쎄드의 은혜가 베풀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진실로 회개하는 삶을 살았던 자가 죽을 때에도 미처 그동안 회개하지 못했던 죄들이 한꺼번에 용서되는 은혜가 베풀어지는 것이다. 그만큼 예수님을 믿기로 결정한 것만큼 자신의 일생에서 있어서 중대한 결정은 없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는 평소 때에 자신이 지었던 죄들을 회개하는 자라야 그때 회개할 때에 나머지 죄들도 용서받는 것이며, 또한 죽기 직전에 다 용서받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임을 알라. 

 

 

2022년 10월 02일(주일)

정병진목사

 

 

  오늘날 믿는 가정이라 할지라도 상당히 많은 가정들 가운데 믿지 않는 식구들이 있음을 보게 된다. 과연 먼저 믿고 있는 가족구성원들은 어떻게 해야 불신가족을 구원으로 이끌 수가 있는 것일까? 오늘 이시간에는 신자들 가정에 더러 있는 불신가족들을 어떻게 전도하여 구원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불신가족이 생기는 형태는 다양하다. 하나는 배우자 둘 다 믿지 않는 상태에서 결혼했는데, 어느 한 쪽 믿는 경우다. 그러면 불신가족이 생기게 된다. 또 하나는 배우자 중에 한 사람은 믿는 자였는데, 결혼할 시기에 어쩔 수 없이 불신자와 결혼을 하거나, 믿는다는 약조하에서 결혼을 하기는 했지만 결혼하자마자 배우자가 곧 옛날로 돌아가버리는 경우다. 이럴 때에도 불신가족이 생긴다. 뿐만 아니라 믿는 부모 밑에서 태어난 자식들 중에서도 불신자녀가 있을 수 있으며,  마지막으로 불신자가 예수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아직까지 나머지 가족구성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경우가 있어 불신가족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불신가족에게 우리는 과연 어떻게 전도해야 하는가?

  우선 우리가 불신가족을 전도하기 전에 알아두아야 할 사항이 있다. 그것은 가족전도는 일반전도에 비해 좀 특수한 면이 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모르는 사람을 전도할 경우에는 2가지 방법이면 족하다. 하나는 불신영혼을 붙잡고 있는 악한 영들의 결박을 풀어버리면서 전도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대적기도를 하면서 전도하면 된다. 그리고 또 하나는 불신영혼에게 복음 자체를 그대로 들려주는 것이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르게 하여 복음을 들은 자를 구원받게 해 주기 때문이다(롬1:16~17). 그것은 복음 자체에 불신자의 영혼을 건지는 능력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족은 이와 다르다. 가족은 대적기도와 복음말씀을 들려주는 것으로 전도하기가 쉽지 않은 측면이 있다. 가족전도는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하는 전도이기 때문이다.  베드로사도는 이렇게 말했다. "아내들아 이와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실을 봄이라(벵전3:1~2)" 그러므로 불신가족을 전도할 때에는 나부터 변화되어 거룩한 행실로 보여주지 못한다면 상당히 전도에 어려움을 겪을 수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불신가족들을 전도할 수 있을까? 사도바울은 고전7장에서 3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만약 우리도 이 방법에 따라 행한다면 우리도 불신남편이나 아내, 불신자녀를 전도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믿는 자는 믿지 않는 가족에게 자신이 그 가족의 구성원으로 해야 할 직무를 성실히 감당하는 것이다(고전7:1~3). 남편은 남편으로서의 의무를, 아내는 아내로서의 의무를, 자녀는 자녀로서의 의무를, 부모는 부모로서의 의무를 잘 감당하는 것이다. 특히 불신남편을 둔 아내나 불신아내를 둔 남편의 경우는 더욱 더 가정에서 자신이 맡은 역할을 잘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특별히 부부 사이라면 부부 사이에 해야 할 의무로서 성생활의 의무를 잘 지켜야 하는 것이다. 사람이라면 대부분 부부의 합당한 성생활을 위해 결혼을 할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의무를 잘 감당하지 않는 부부는 서로 사랑하기가 어렵고 한 마음이 되기도 어려우며 한 신앙을 갖기도 어려울 것이다. 심지어 사도바울은 부부는 자신의 몸을 자기가 주장해서는 아니 된다고까지 말했다(고전7:4~5). 이런 말들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부부는 부부로서 마땅히 준수해야 할 부부생활의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그 의무를 소홀히 해서는 결코 배우자전도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부는 금욕주의자가 되어서는 아니 된다. 결혼한 가정의 성은 결코 금욕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부는 기도를 위해서 합의한 것 외에는 방을 절대 따로 써서는 아니 된다. 사실 믿지 않는 남편이 믿음을 갖지 않는 이유를 살펴보면, 아내의 신앙이 싫어서라기보다는 아내로서 남편에게 해야 할 의무를 아내가 소홀히 행하고 있는 측면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신가족을 전도하려면 믿는가족은 자신이 부여받은 책임과 의무를 성실히 잘 감당해야 한다. 특히 부부사이에서는 부부생활을 기피해서는 아니 된다. 

  둘째, 믿지 않는 배우자라 할지라도 믿는 성도가 그를 끝까지 버리지 않는 것이다(고전7:12~13). 사도바울은 말한다. 믿지 않는 남편이라 할지라도 떨어지지만 않는다면 불신 남편은 자신의 믿는 아내 안에서 거룩하게 될 수 있다고 말이다(고전7:14). 그러므로 믿지 않는 남편이라도 남편으로서의 의무와 책임을 잘 감당하고 있고, 같이 살기를 바라고 있다면 절대 불신배우자와 이혼을 생각해서는 아니 된다. 믿지 않는 남편이 믿는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둘 다 믿지 않다가 구원을 받는 경우보다 훨씬 더 구원받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할 수만 있으면 불신남편에게 붙어있으라. 이혼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믿는 배우자와 함께 살게 되면, 아무래도 복음에 대해, 예수님에 대해, 천국과 지옥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듣게 될 것이며, 믿는 배우자의 신앙을 보고 그를 따라고픈 생각이 더 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신가족을 전도하는 두번째 비결은 불신가족과 절대 헤어지지 말라는 것이다. 끝까지 붙어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신남편이 자기를 못살게 한다고 해서 쉽게 이혼을 생각해서는 아니 된다. 사실 아내가 남편에게 해야 할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지 않고 있는 것이 불신남편이 믿는 아내에게 이혼을 요구하는 더 많은 경우이기 때문이다.

  셋째, 불신가족의 구원에 대해 너무 조급해 하지 말라는 것이다(고전7:14). 사도바울은 그것의 예를 믿는 부모로 인해 자녀가 깨끗하게 되는 경우를 든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아이치고 죄된 본성이 없이 태어나는 아이는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볼 때 아이는 깨끗하지 않는 존재로 태어난다고 하겠다. 하지만 부모의 양육과 돌봄을 통해서 아이는 자라나며, 부모의 신앙을 보고 그도 예수님을 믿어 죄를 깨끗히 씻음받고 구원받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데 그 아이가 이러한 신앙을 갖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됨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믿지 않는 배우자가 믿음을 갖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도 분명하다. 그래도 믿지 않는 자가 믿는 자와 함께 살다보면, 믿지 않는 자는 믿는 가족구성원을 통하여 점차로 구원으로 이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구원은 순간이 아니라 어쩌면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장 나의 배우자가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 해서 조급해하지 말라는 것이다. 내가 낳은 아이가 걸음마를 잘 못 하고, 말을 잘 못 한다고 해서 큰 일 난 것처럼 호들갑을 떨어서는 아니 되는 것처럼 말이다. 정도와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참고 기다려주면 아이는 금새 걸음마를 하게 될 것이고 말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가족전도만큼은 조급한 마음을 먹어서는 아니 된다. 조금 기다려주면 된다. 오히려 내가 해야 할 책임과 의무를 성실히 감당해보라. 그리고 조금 어려움이 발생한다 하더라도 쉽게 이혼같은 것을 생각하지 말라. 그리고 믿는 자가 믿지 않는 자와 붙어있을 수 있도록 노력해보자. 그러면 조만간에 반드시 좋은 일이 보이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믿는 자가 하나님께 불신가족의 구원을 계속해서 기도로 하나님게 요청하는 일과 불신가족을 붙잡고 있는 악한 영들을 수시로 결박하는 일이다. 이것은 불신가족이 보다 더 빨리 예수그리스도를 믿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건투를 빈다.

20160424_주일낮예배.jpg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