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101) 세상 권력자들의 바람과 사도 바울의 바람(행24:24~25:12)_2023-01-27(금)

https://youtu.be/leZrm9kkKZk [또는 https://tv.naver.com/v/32764046]

 

1. 가이사랴에 있던 로마 총독 벨릭스는 자신이 구류하고 있는 바울에게 어떤 것을 바랐었는가?

  유대인들의 대표기관인 산헤드린 공회에 의해 고발되었던 사도 바울은 가이사랴에 있는 로마 총독 벨릭스에게서 재판을 받는다. 그러나 유대인들과의 관계 때문에 벨릭스는 무죄한 바울이었지만 그에게 무죄 선고를 내리지 않고 다만 선고 연기를 한다. 그리고 그를 구류하여 둔다. 하지만 정작 바울은 죄가 없는 사람이었기에 총독은 그에게 어느 정도 자유를 주면서 타인의 방문까지도 허락한다(행24:22~23). 수일 후에 벨릭스는 자신의 유대인 아내였던 드루실라와 함께 바울을 불러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관하여 듣게 된다. 그러나 바울이 총독에게 들려준 것은 '의와 절제와 장차 올 심판'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자 벨릭스는 바울의 말을 듣고 처음에는 두려워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 그는 바울로부터 돈(뇌물)을 받을까 하여 계속해서 더 그를 불러내어 그의 말을 들으려 하였다. 그것도 무려 2년 동안이나 말이다. 그렇다. 세상 권력자들의 바람은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첫째로, 평화와 안정을 이루는 것이다. 이처럼 권력자들은 자신의 지위와 신분을 오래 유지하기 위하여 어떤 정치적인 타협도 마다하지 않는 것이다. 둘째로, 돈(뇌물)을 요구하는 것이다. 권력을 이용하여 돈을 갈취하는 것이다. 로마 총독 벨릭스도 다른 세상 권력자들이 밟았던 그 노선을 그대로 따르고 있었다. 

 

2. 벨릭스의 뒤를 이어 부임한 베스도 총독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벨릭스가 바울을 구류하여 둔 지 약 2년이 지난 A.D.60년경 벨릭스는 로마로부터 소환 명령을 받는다. 그리고 그는 보직 해임을 당한다. 이는 유대인들의 청원에 따라 로마 총독으로서의 권한을 상실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가이사랴에 있는 유대인들과 헬라인들과의 충돌 문제에 벨릭스가 헬라인들의 편을 들어준 것이 그만 유대인들의 원성을 사게 되었고, 그것으로 인하여 로마 황제에게까지 청원이 들어가자, 로마 황제가 그를 소환하여 보직 해임을 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벨릭스의 뒤를 이어 베스도가 로마 총독으로 부임하게 된다(재위 A.D.60~62). 그런데 역사의 기록에 따르면, 전임 총독 벨릭스는 아주 잔인했고 탐욕스러웠으며 불의했다고 한다. 하지만 후임 총독 베스도는 훌륭하고 능력있고 공평한 통치자라 불림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베스도도 유대나라를 잘 통치하기 위해서는 유대인들과 좋은 관계를 맺어야 했었다. 

 

3. 베스도가 부임한 후 한 일은 무엇이었는가?

  베스도는 선임 총독이 소환당한 후 보직 해임당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는 유대인들과 친하게 지내보려고 애를 쓴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이 부임한 장소인 가이사랴에서 무려 104km 떨어진 예루살렘으로 부임 후 3일 만에 방문을 한다. 그런데 사실은 유대 대표자들이 가이사랴에 와서 로마 총독을 알현해야 옳은 일이었다. 하지만 베스도는 자신의 권위를 부리지 않고 겸손히 예루살렘으로 가서 유대 지도자들을 만난 것이다. 그런데 만나자마자 유대 대표자들은 바울을 신임 총독에게 고소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들은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옮겨오기를 청하였다. 이는 매복하여 바울을 죽이려고 하는 의도 때문이었다. 그런데 베스도는 이미 그들의 이러한 속내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곧 자신이 가이사랴로 내려갈 터이니 거기 가서 고발하라고 말한다. 결국 바울을 죽이려는 유대인들의 계획은 또한 연기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은 가이사랴에 가서 또 바울을 베스도 총독에게 고발한다. 그리고 가이사랴에 도착한 다음 날 베스도는 재판을 열어 바울을 심리한다. 베스도는 전임 총독에 비해 발 빠르게 움직인 것이다. 그의 성실성을 조금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 베스도가 바울에게 제안한 것은 무엇이었는가?

  이어 고발자였던 대제사장들과 유대인들 중에서 고관들로 구성된 산헤드린 공회는 바울의 여러 가지 죄를 거론하면서 바울을 공박한다. 하지만 바울은 그들이 말하는 죄들 곧 율법이나 성전이나 가이사에게 죄를 저지른 적이 없었기에, 바울은 자신의 무죄함을 하나하나씩 변호하게 된다. 그렇지만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베스도는 유대인들이 말했던 것을 따라 예루살렘에 가서 자기에게 재판을 받는 것이 어떠한가를 묻는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자신이 유대인들에게 잘못 행한 것이 전혀 없다는 것과 자신이 죽을 죄를 짓지 않았기에 유대인들에게 자신을 내주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라고 피력하면서 자신은 로마 황제인 가이사에게 상소한다고 호소한다(행25:11). 그러자 베스도는 자신과 함께 배석한 위원들과 협의한 후에 바울의 청원을 따라 가이사에게 가서 재판을 받을 것을 허락한다. 역시 베스도도 전임 총독 벨릭스처럼 유대인들의 눈치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로마 시민으로서 바울의 청원은 합당한 것이었기에 결국 베스도는 바울의 청원을 거절하지 못하고, 바울을 로마에 보내게 된다. 

 

5. 두 명의 총독 앞에 선 복음 전도자 바울의 관심사는 대체 무엇이었는가?

  그렇다면 바울의 재판을 맡았던 2명의 로마 총독들의 최대 관심사는 무엇이었는가? 유난히도 탐욕이 많았던 벨릭스 총독은 유대인들과 잘 지내기를 원했고 더불어 돈을 밝히는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재판을 올바르게 하지 않았다. 바울이 분명 무죄임에도 불구하고 바울에게 무죄 선고를 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재판 선고를 뒤로 미루면서 그를 무려 2년간 붙잡아 두었다. 그리고 바울에게 돈이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바울로부터 돈을 받아 볼 속셈으로 자꾸 바울을 불러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그의 뒤를 이어 부임한 베스도는 벨릭스보다는 조금 더 나았다. 왜냐하면 그는 비교적 원리 원칙대로 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베스도도 역시 유대 총독으로서 유대인들의 눈치를 보아야 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말을 들어주려고 했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이 로마 시민이라는 사실을 들어서 가이사에게 재판받을 것을 청원한다. 

  그런데 우리는 벨릭스 총독이 바울을 자꾸 불렀을 때에, 바울이 그에게 전한 말씀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하다. 바울은 이때 여느 사람처럼 자신의 석방을 위해 벨릭스에게 아첨의 말을 하거나, 뇌물을 주었던 것일까? 아니었다. 바울은 달랐다. 그는 하나님의 사도였던 것이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복음 전파를 위해 이 땅에 보내어진 사람인만큼, 그가 누구를 만나든지 혹은 누구와 대화를 하든지, 항상 그의 만남의 원칙은 복음 전파였다. 그러므로 그는 사람이란 모름지기 자신의 죄를 정결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아무리 자신에게 주어진 세상의 권력이나 쾌락이 좋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절제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사람이 죽은 다음에 맞이하게 될 심판을 이야기하였다. 그리하여 회개하고, 주 예수를 믿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의 최대의 관심사였다. 그랬다. 바울은 이처럼 오직 복음 전파 일념 하나로 모든 삶을 살아낸 사람이었다. 그것은 자신이 이 땅에 존재하는 목적이었고 자신이 가야 할 길이었기 때문이다. 

 

 

2023년 01월 27일(금)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99) 가장 안전한 피난처에서 보호를 받으려면?(행23:12~35)_2023-01-20(금)

https://youtu.be/lvh0MWsX2B0 [또는 https://tv.naver.com/v/32646619]

 

1. A.D.58년경 바울이 1차 공회를 마치자 유대인들이 당을 지어 결의한 것은 무엇이었는가?

  A.D.58년경 바울이 예루살렘에 들어왔을 때에 에베소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고소를 당하게 되어 공회석상에 서게 된다. 하지만 공회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로 나눠짐으로 서로 간의 싸움판이 되고 말았다. 그러자 천부장은 유대 민족끼리는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음을 간파하고 임시 대기를 시킨다. 그런데 그날 밤 유대인들이 당을 지어 결의를 하게 되는데, 바울을 살해하기 전까지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않겠다고 한 것이다(행23:12~13). 일종의 바울 암살단을 조직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암살단은 다시 공회가 열리면 안토니오 요새에서 공회로 이동하는 바울을 제거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2. 바울 암살 음모는 어떻게 바울에게도 알려지게 되었는가?

  그런데 이러한 바울 암살 음모는 바울에게도 알려지게 되었다. 그것은 바울의 조카(생질)가 와서 그 사실을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행23:16). 그렇다면 어떻게 바울의 조카는 바울 암살 음모를 알게 되었을까? 우리는 여기서 처음으로 바울의 가족에 대한 정보를 접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울에게 누나가 있었다는 것이며, 그 누나에게는 적어도 아들 청년이 있었다는 것이다. 바울의 누나가 언제부터 예루살렘에서 살게 되었는지는 알 수는 없지만 그녀가 장성한 청년 아들을 두었다는 것은 팩트다. 그런데 바울은 원래 길리기아 주의 다소 성에서 태어나서 성장하였다(행21:39, 22:3). 그리고 어느 때부턴가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유학을 와서 살게 된다. 그리고 그때에 바울은 율법의 가장 엄한 교훈을 가르치는 바리새인의 거장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공부를 하게 된다(행22:3). 그래서 그도 역시 바리새인이 되었고 바리새인의 후손이 된 것이다. 그런데 바울의 암살 음모는 당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바리새인 포함)도 알고 있었을 것이므로, 바울의 매형은 이러한 사람들 중의 하나였거나 이들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사람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니까 바울의 매형이 이러한 첩보를 입수한 뒤, 자기 아들을 시켜 바울의 신변이 위험하다는 것을 바울에게 알려준 것이 아닌가 싶다. 

 

3. 바울 암살 첩보를 입수한 천부장은 어떤 조치를 취했는가?

  그러자 바울의 조카가 바울에게 그와 같은 사실을 알려주었고, 바울은 백부장을 통해 천부장에게 이와 같은 사실을 알려준다. 그러나 청년으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은 천부장은 그날 밤에 바울을 보다 안전한 장소로 피신시키기로 결정한다. 그리하여 그날 밤 9시, 보병 200명, 기마병 70명, 창병 200명으로 꾸려진 호송 군사들과 함께 바울은 가이사야의 총독 벨릭스에게 보내진다(행23:23). 왜냐하면 예루살렘에 있는 로마 군인들은 고작 600명 정도에 불과했지만, 총독관저가 있는 가이사랴에는 로마 군인 약 6,000명 정도가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신변이 보다 더 안전한 곳이자 공정한 재판을 받을 수 있는 장소는 역시 가이사랴였다. 그리고 더불어 당시 총독 벨릭스 역시 로마 시민권을 가진 자에 대한 정식 재판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천부장은 바울을 총독에게 보내었던 것이다. 또한 총독 벨릭스는 유대 땅 뿐만 아니라, 수리아 그리고 길리기아 성까지 다스리고 재판하는 통치 권한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바울에 대한 재판도 할 수가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바울은 돈 한 푼 내지 않은 채, 미결수의 신분으로 470명의 로마 군사들에게 둘러쌓여 안전하게 가이사랴까지 이동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4. 바울이 죽지 않고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로 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바울이 암살단에 의해 죽지 아니하고 가이사랴까지 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크게 2가지다. 첫째는 주 예수님께서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뿐만 아니라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한다고 하는 말씀이 먼저 있었기 때문이다(행21:11). 그러므로 바울은 안전하게 로마까지 이동해야 했다. 그러므로 그가 예루살렘에서 죽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 어떤 사건에 하나님의 섭리가 작용하면 인간의 어떤 계획도 물거품이 되고 마는 것이다. 고로 바울이 로마에서도 복음을 전파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없었다면 바울은 아마도 예루살렘에서 인생을 마감해야 했을른지도 모른다. 둘째는, 그를 도와주는 여러 종류의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먼저는 천부장이 있었다. 맨 처음에 천부장은 소요 사태의 진압 과정에서 바울을 만났으나, 그가 헬라어를 구사할 줄 알고, 로마 시민이었다는 것 때문에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아직 바울이 죄인인지 판결이 나지 않은 상태에서 그를 죄인으로 취급했었기 때문이다. 우선적으로 그는 바울을 쇠사슬에 결박시켰고 더욱이 그를 채찍질 할 것을 명령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이 잘못되면 도리어 자신이 벌을 받게 되고 관직을 박탈당할 위험이 있었기에 천부장은 바울의 안전을 적극적으로 도모해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바울 암살 음모를 듣게 되자 그는 즉시 바울을 보다 더 안전한 가이사랴의 총독관저로 보내게 되었던 것이다. 거기에서 안전하게 재판을 받도록 배려해 준 것이다. 둘째로는 좀 전에 살펴본 바와 같이 바울의 생질(조카)이 있었다. 그리하여 바울은 죽지 않고 가이사랴에 갈 수 있었던 것이다. 

 

5. 이 사건이 보여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안전한 피난처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런데 그것은 역시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에서 바울을 도와줄 자가 아무도 없을 때에, 로마의 천부장과 바울의 조카 생질을 바로 그곳에 있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사실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에는 예루살렘 안에 있는 교회 구성원들로부터 보호를 받을 것도 어느 정도는 기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안에는 믿는 이 수만 명이 있다고 주님의 친동생 야고보가 말해 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울이 막상 붙들려 갔을 때에 어느 누구도 바울을 구출하는 데 도와주지 않았다. 오히려 엉뚱하게도 로마 장교가 나타나서 바울을 지켜주었고 그리고 바울의 조카가 나타나서 바울의 살해 위험으로부터 그를 지켜주었던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미리 그곳에 사람을 배치하여 바울을 구원하기로 섭리하시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피난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한다. 특히 우리들 중에 누구라도 하나님의 보호를 받으려면 바울의 경우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것은 복음 전파의 사명이 남아 있다면 어느 누구도 죽지 않고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고로, 우리 인간편에서 볼 때 가장 안전한 피난처에서 보호를 받으려면 우리도 역시 복음 전파의 사명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역시 당신의 일을 하는 우리들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반드시 우리를 위험으로부터 지켜주시며 보호해 주시기 때문이다. 

시46:1~3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2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3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셀라) 
시73:28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2023년 01월 20일(금)

정병진목사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사도행전강해(92) 바울은 자신에게 주어진 예언과 사명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했는가?(행21:1~16)_2023-01-03(화)

https://youtu.be/sDO6bFyCA0A  [혹은 https://tv.naver.com/v/32116444 ]

1. 사명자는 언제 사명이 주어지는가?

  바울은 주 예수님으로부터 처음부터 복음 전파의 사명을 부여받고 태어난 자였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자신의 어머니의 태중에 있을 때부터 택정함을 입었기 때문이다(갈1:15). 이처럼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낸 자들 중에는 특별히 어떤 사명을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나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 것이다. 바울도 처음에는 자신에게 어떤 사명이 있는지를 잘 몰랐다. 적어도 30대 정도까지는 그랬다. 그런데 그러던 어느 날 주 예수님께서 그에게 찾아오셨다. 그리고 다메섹에 사는 아나니아를 통하여 그에게 사명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셨다. 그것은 그가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이 땅에 보내어진 사명자라는 것이었다. 아나니아는 그에게 주 예수의 이름을 이방인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파하도록 택한 주님의 그릇이라고 알려 주었다(행9:15). 그랬다. 바울도 처음에는 자신에게 어떤 사명이 있는지를 잘 몰랐으나,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때는 예루살렘교회의 일곱 집사 가운데 하나였던 스데반을 죽이는 데 앞장설 때에, 주 예수께서 그에게 홀연히 나타나셔서 알게 된 것이다. 그렇다. 이 땅에는 사명자가 있다. 사명자에게는 누구나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길이 있고 그 길을 걸어가게 된다. 그 길이 무엇인지를 잘 모른다고 해도 때가 되면 그 길을 가도록 하나님께서 불러내시고 그 길을 걷게 하시기 때문이다. 

 

2. 바울의 제3차 전도여행 중 밀레도 이후에 어디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갔는가?

  제3차 전도여행 중에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을 초청하여 고별설교를 한 바울은 이제 예루살렘으로 향하게 된다. 그때 바울은 밀레도에서 고스로 다시 고스에서 로도로, 로도에서 바다라를 거쳐 두로에 상륙하게 된다. '두로'라는 도시는 수리아의 아래쪽에 위치한 세계 최고의 항구도시였다. 그래서 배에 짐을 싣고 내려야 했다. 그러자 바울은 그 시간 동안 약 일주일을 그곳에서 보낸다. 그리고 돌레마이를 지나 가이사랴로 내려간다. 바울은 거기에서 예루살렘교회의 초기 일곱 집사 가운데 하나였던 복음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간 후 거기서 다시 얼마 동안 지내고 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 

 

3. 두로와 가이사랴에서 무슨 특별한 일이 있었는가?

  그런데 바울은 두로와 가이사랴에서 예언을 듣는다. 그것은 바울 자신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에 관한 것이었다. 먼저, 두로에서는 어떤 제자들이 바울에게 영을 통하여 말하기를, 예루살렘 안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하였다. 아마도 바울의 신변에 어떤 위험한 일어날 것임을 환상으로 보았던 것 같다. 그리고 거기에서 약 80Km 떨어진 가이사랴로 내려간다. 그런데 거기에서 바울은 예언이 아니라 어떤 선지자를 만난다. 그는 유대로부터 내려온 선지자로서, 과거 30년 전에 바울이 안디옥교회에 있을 때에 와서 천하가 흉년이 들 것을 예언했던 바로 그 선지자였다(행11:28). 그의 이름은 '아가보'였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서 정말 천하에 큰 흉년이 들었다. 그때는 A.D.46년경이었다. 그런데 다시 30년이 지나 그 아가보 선지자가 가이샤라에 있는 빌립 집사의 집에 온 것이다. 그리고 그는 바울의 허리띠를 가져다가 자신의 손들과 발들을 묶었다. 그러고는 "성령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라는 말과 더불어 예언을 하였다. 그것은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는 예언이었다(행21:11). 그는 말만 한 것이 아니라, 그가 보았던 것을 실제로 재현함으로, 예언을 하였다. 그것은 그만큼 바울의 결박과 체포 그리고 환난이 앞으로 확실히 일어난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4. 두로와 가이사랴의 예언은 서로 어떻게 다르며, 어떤 것이 잘못된 예언인가?

  바울은 두로에서도 믿음의 형제들을 만났다. 특히 환상을 보고 말할 줄 아는 은사를 받은 형제들을 거기에서 만났다. 그때 그들 형제들은 바울더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 것을 권고했다. 그런데 바울에게 이렇게 말했던 것은 과연 옳은 예언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이 옳은 예언이었는지를 우리는 바울이 가이샤라에 도착했을 때 아가보 선지자가 했던 예언을 통해 비교해 보자. 아가보는 바울에게 어떻게 예언했는가? 그는 이렇게 예언했다. 그것을 헬라어 원문으로 그대로 직역해 보겠다. "성령께서 이것들을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 안에서 유대인들이 이와 같이 이 띠가 있는 바 그 남자를 결박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방인들의 손들 안으로 넘겨줄 것입니다(행21:11)" 그렇다. 아가보 선지자는 정확하게 예언한 것이다. 왜냐하면 예언이란 성령께서 보여 주시고 들려주신 것을 그대로 말하는 것이지, 거기에다가 자신의 생각을 집어넣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두로의 형제들은 자신의 생각을 집어넣어 바울에게 말했던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미숙한 예언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바울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그렇게 예언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잘못된 예언을 한 것이라고 나무랄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그들이 예언을 은사를 사용하는데 있어서 미숙하다는 것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예언이란 자신의 생각을 집어넣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보여 주시고 들려주신 것을 그대로 전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아가보 선지자는 자신이 보고 들었던 것에 어떤 것도 더하거나 빼지 않고 그대로 전달했던 바른 선지자였음을 알 수 있다. 

 

5. 바울은 형제들의 예언을 받은 후 자신의 사명과 그것을 어떻게 연결했는가?

  그때 바울은 형제들의 예언을 듣고 어떻게 반응했는가?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을 포기하고 말았는가? 아니었다. 바울은 결코 그렇게 행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형제들이 그에게 한 예언은 성령께서 주신 예언이 아니란 말인가? 아니다. 맞다. 그들이 받았던 것도 역시 성령께서 주신 것이다. 하지만 예언은 우리의 미래를 결정하기 위한 목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다만 그러한 일이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다고 알려 줄 뿐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의 길을 그대로 걸어갔던 것이다. 예언이란 사명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에게 어느 부분에 있을 일을 미리 말해 주는 것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사도 바울이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을 초청하여 말했던 고별설교에서 찾아볼 수 있다. 

행20:22~24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23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그렇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가 걸어갈 길이 사명으로 미리 주어진 채 있는 것이다. 고로 그 길을 걸어가는데 어떤 환난이나 고난이 기다리고 있다고 해서 그 길을 가지 않고 다른 길을 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환란이 사명을 가로막지는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우리는 예언을 통하여 우리의 미래에 어떤 일이 있을 것인지를 미리 알 수 있으므로 그날을 마음으로 잘 준비할 수가 있을 것이다. 

 

2023년 01월 03일(화)

정병진목사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