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룟유다, 그는 가장 불쌍한 사람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더 좋을 뻔 했을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가 자신의 스승을 팔아넘긴 배신자의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왜 그는 자신의 스승을 팔아넘기려 한 것일까? 그리고 난 후에 그는 분명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뉘우쳤는데, 왜 궁극적으로 자살을 선택한 것인가? 그리고 그는 죽어서 대체 어디로 간 것인가? 지옥인가? 아니면 다른 곳인가? 성경이 들려주는 그의 최후의 운명은 과연 어디인가? 그리고 오늘날 자살하는 모든 사람은 다 지옥으로 가는 것인가? 여기 그 대답이 들어있다.

 

2022-06-12(주일) 주일찬양예배

제목: 사도행전 강해(07) 가룟유다, 그는 지옥에 떨어졌을까?(가룟유다의 최후와 맛디아 선출)(행1:15~26)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WSg0zLks3gk  [혹은 https://tv.naver.com/v/27323630 ]

 

1. 들어가며

  가룟유다는 죽어서 과연 어디로 갔을까?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선택받은 12사도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스승인 예수를 팔아넘기고 말았다. 나중에 자신이 저지른 일을 자책하던 가룟 유다는 자기의 목숨을 스스로 끊는다. 그럼, 그의 영혼은 어디로 갔을까? 곧바로 지옥으로 갔던 것일까? 성경에서는 "제 곳으로 갔다"고 되어 있는데(행1:25), 제 곳으로 갔다는 말의 뜻은 대체 무엇인가? 이와 더불어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것은 "성도가 자살하면 무조건 지옥에 떨어지는가?" 하는 것이다. 인공호흡기로 연명하던 어떤 노인이 인공호흡기를 제거했다고 치자. 그러면 그것도 자살이라고 봐야 하는가? 오늘은 가룟 유다의 자살을 좀 더 들여다보고자 한다.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넘긴 죄가 잘못 되었음을 본인이 직접 시인했다. 그리고 그 죄에 대해 심히 아파했다. 뉘우쳤던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의 죄를 왜 용서받지 못한 것일까? 한편 가룟유다 대신에 보선하여 들어온 '맛디아'라는 인물은 대체 누구이며, 베드로는 왜 궐이 난 가룟 유다의 자리 대신에 굳이 새로운 사람을 보선하려고 했는지에 대해서도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2. 자살하면 무조건 지옥에 떨어지는가?

  자살하면 무조건 지옥인가? 원칙은 맞다. 왜냐하면 자살도 일종의 살인죄에 해당하는데, 자살하게 되면 자신이 자신을 살인한 죄를 용서받을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다른 죄들은 회개함으로 용서받을 수 있어도, 자살한 죄에 대해서만큼은 용서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자살한 자는 결단코 새 예루살렘 성 곧 천국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계21:8). 고로 자살에 대한 결과로서 천국 아니면 지옥이라는 이분법적인 구분으로 분류한다면 가룟유다는 분명 지옥에 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다음의 경우는 어떠한가? 서두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인공호흡기로 연명하던 어떤 노인이 잠깐 깨어나서 자기의 인공호흡기를 스스로 떼어버렸다고 치자. 그리고 얼마 후 숨을 거두었다고 치자. 이 노인은 자살한 것인가? 물리적으로는 그랬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면 이 노인은 자기가 자기를 죽인 죄 때문에 지옥에 떨어져야 하는가? 이럴 때에는 쉽게 단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와서 성경에 대한 새로운 조명을 얻게 되었다. 그것은 사람의 운명이 마태복음과 요한계시록에 보니 새로운 장소가 있는 것이다. 그곳은 바로 '성밖(바깥 어두운데)'이라는 장소다(마25:10, 계22:15). 성도가 죽었을 때에 새 예루살렘 성 안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성밖으로 밀려나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그럼, 새 예루살렘 성밖은 지옥인가 천국인가? 우리는 이 문제를 놓고 한 때 심각하게 고민했었다. 그래서 결론이 난 것은 성밖을 결코 '천국'이라고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곳은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곳이기 때문이다(마25:30). 실제로 주님께서도 결코 그곳에는 심방을 가지 않는 곳이기 때문이다. 어떤 곳에서는 형벌을 받기도 한다(마24:51). 그러므로 그곳을 '천국'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을 두고 무조건 그를 가리켜 "지옥에 떨어졌다"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서는 조금 조심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지옥'이라는 말은 불과 유황이 타는 못 곧 불못을 가리키는데, 믿는 이들 중에 죄를 해결하지 못해 성밖으로 가는 이들도 있기 때문이다(막9:43). 그리고 마태복음과 요한계시록을 보면, '불못'(계21:8)과 '성밖'(계22:15)은 분명 다른 곳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자살한 이들에 대해서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런 사람은 결단코 새 예루살렘 성 안 곧 천국에는 못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자신을 죽인 죄에 대해서 용서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니 회개할 기회를 스스로 박탈시켜 버림으로 자신이 지은 살인죄가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살한 자는 최소한 천국에는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3. 가룟유다는 죽어서 어디로 갔는가?

  그렇다면 가룟유다는 죽어서 어디로 갔을까? 성경은 그의 죽음과 관련하여 2가지 사실을 알려준다. 첫째, 그가 자살을 했다는 것이다(마27:3~5, 행1:18~19). 그는 예수께서 유죄선고를 받았다는 것을 안 후에 스스로 뉘우쳐 자기가 예수님을 넘겨준 값으로 받은 은 30냥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갔다 주었다(마27:3). 그리고 말했다. "내가 무죄한 자의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마27:4) 하지만 그들은 그것이 자기들에게 무슨 상관이냐고 하면서 그가 당하라고 말했다. 그러자 유다는 은 30을 성소 안으로 던져버린 후에 스스로 물러가서 목을 매어 죽음을 선택한다(마27:5). 그런데, 사도행전 1장에서는 베드로가 이후에 되어진 일들에 대해서 더 자세한 정보를 알려준다. 그것은 그가 목을 매단 이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흘러나와서 죽었다는 것이다(행1:18). 아마도 그가 목을 매단 나무가 부러졌든지 아니면 끈이 떨어졌든지 그가 나무에서 떨어졌고 그때 받은 충격이나 어떤 요인으로 인해 배가 터졌으며 그래서 그 안에 있는 장기들이 쏟어져 나왔다는 것이다. 비참한 죽음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와 같은 사실은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다고도 했다(행1:19). 그러자 대제사장들이 성소에 던져버린 그 돈으로 밭을 샀는데, 그 밭의 이름을 "아켈다마(피밭)"라고 부르며, 나그네의 묘지로 삼았다는 것이다(행1:19). 

  둘째, 그가 자살한 후 자기의 직무로부터 [떠나] 자기 자신의 자리(장소) 안으로 가기 위하여 옆으로 걸어갔다는 것이다(행1:25).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자신이 이땅에 보내어질 때 그에게도 어떤 사명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봉사의 직무와 사도의 직무였을 것이다(행1:25). 그리고 그가 그것을 성실히 감당했다면 그는 하늘에 이미 준비된 그의 보좌 자리를 앉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 직무를 버린 것이다. 그리고 자기자신이 선택한 자리(장소) 안으로 가게 된 것이다. 그것은 최소한 '성밖'이요 더 나아가서는 '불못'이 될 수 있을 것이다. 

 

4. 가룟유다는 후회만했는가 회개도 했는가?

  그렇다면 가룟유다는 자기의 스승을 판 죄에 대해서 어떻게 여겼는가? 제일 처음 그는 대제사장들을 찾아가서, 자기의 스승을 그들에게 넘겨줄 테니까 얼마나 주겠는지 흥정을 하였다(마26:14~16). 그리하여 그들로부터 은 30을 받고 주님을 넘겨주게 된다. 그러나 '은 30'이라는 돈은 노예 1명 값어치 수준 밖에 안 되기 때문에, 그가 돈이 탐이 나서 스승을 팔아넘긴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아마도 다른 뜻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것의 한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다. 가룟유다는 자신이 스승의 능력과 권세와 지혜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제자였다. 그러다 보니 예수님 정도 되면 로마에 대항하여 싸워서 얼마나 새로운 나라를 건설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일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다. 그러자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자극시키고자 일부러 대제사장들에게 넘겨주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께서 분연히 일어나 대제사장들과 또한 이들과 결탁한 로마에 대항하여 싸울 것이로 그리하여 새 나라를 건설할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세상 나라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으시고 오히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에게 순순히 붙잡혀 죽으러 가시는 것이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의 판단이 잘못 되었음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스승을 팔아넘긴 죄에 대해 자책하게 되었고,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지른 것에 대해서 자기가 그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는 그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에 대해 다른 가설을 세워볼 수도 있다. 그가 예수님을 팔아넘긴 이유는 그가 구약성경에 나오는 배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함이었다고 말이다. 누군가는 예수님을 팔아넘겨야 하는데, 가룟유다가 그 일을 감당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예수님을 넘겨서 죽게 한 것은 잘 한 일이요 상 받을 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는 그는 자신의 스승을 팔아넘긴 죄책에 시달리게 되었고 자신의 양심의 참소를 이기지 못해 자살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가 지옥에 갔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메시야에 대한 구약 예언을 이룬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어떠한가? 그럴듯 해 보이지 아니한가? 하지만 이것은 거의 궤변수준이 아닌가 판단된다. 가룟유다는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기대가 허물어져지자 예수님을 자극해서라도 자신의 기대에 부응하는 스승이 되도록 조종하려 했다고 보는 것이 훨씬 더 가능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과연 스승을 팔아 넘긴 죄를 가룟유다가 회개를 했느냐 하는 것이다. 사실 그가 자살하여 죽은 시점은 아직 예수님께서 죽지 않은 시점이었다. 예수께서 잡혀서 시위대 뜰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때라도 가룟유다는 회개할 기회가 있었던 것이다. 그때도 늦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라도 예수님께 나아가서 자신의 잘못을 고하고 용서해주시기를 청했으면 그는 아마 용서를 받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그는 자신이 예수님을 팔아넘긴 죄를 후회까지는 했지만, 회개는 안 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회개라는 것은 첫째, 자신의 죄를 시인하고 둘째, 그것에 대해 스스로 뉘우쳐 그 죄에 대해 아파하는 것이며, 셋째, 그 죄값에 대해서 하나님께 나아가 자신의 처우를 하나님께서 맡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룟유다는 둘째 단계까지 행했지만 셋째 단계까지 나아가지 못했던 것이다. 고로 그는 후회는 했지만 회개는 안 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자살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의미없게 만들어버린 격이 된 것이다. 예수께서는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그리고 인류의 죄값을 담당하시기 위해 죽으신 것이다. 그러나 가룟유다는 그 죄값을 예수님께 돌리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받으려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 가룟유다는 자신이 처리하려고 했을 뿐 그 문제를 주님께 가져간 후 주님의 처분을 기다리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이 죄인 것이다. 고로 그는 후회는 했지만 회개는 안 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도 확인이 된다. 돌아온 탕자가 어떻게 되어서 자신이지은 죄를 용서받았는지를 살펴보자. 그는 첫째, 그는 자신의 죄를 지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했다.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그리고 둘째, 그는 스스로 자신의 잘못된 것을 뉘우쳤다. 그리고 셋째, 그리고 나서는 아버지께 돌아가 아버지의 처분을 기다렸다는 것이다. 이것이 생각과 감정와 의지를 동원한 회개의 3요소가 다 들어있는 회개인 것이다. 그런데 가룟유다는 처음 2가지 것들은 행했지만 마지막 세 번째 것은 행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결국 그는 성밖이나 혹은 불못에 떨어지고 만 것이다. 

 

5. 왜 베드로는 죽은 가룟유다 대신에 다른 사도를 보선해야 했는가?

  왜 베드로는 그 중요한 기도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새 사도를 보선하려고 했던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예수님으로부터 혹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특별한 지시를 전달받은 것이 있지 않았었나 추측이 된다. 왜냐하면 가룟유다가 궐이 나자 그때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다른 사도를 보선했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이후에는 어떤 사도들이 죽더라도 사도회에서는 다른 이를 보선하지 않았다. 그런데 베드로는 가룟유다 대신에 다른 사도들을 보선하려고 하였다. 다른 사도들을 보선하라는 지시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였을까? 그것은 아마도 천국의 12기초석 위에 새겨질 이름이 가룟유다 대신에 다른 사도의 이름이 필요해서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왜냐하면 천국은 새 예루살렘 성을 가리키는 것인데, 그 성의 기초석은 12개로서 이 기초석 위에 어린양의 12사도들의 이름이 기록되어야 기 때문이다(계21:14). 그런데 한 사람의 이름이 지워진 상태가 되었으므로 그 이름 대신에 들어갈 새로운 이름이 필요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왼다. 

 

6. 새 사도인 '맛디아'는 어떤 인물인가?

  그리하여 베드로가 일어나 새로운 사도 한 명을 제비뽑아서 보선할 것을 제안한다(행1:21~22). 그리고 그 조건으로서 2가지를 제시한다. 하나는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부터 그분이 승천하신 날까지 12사도들과 함께 해온 자들 가운데서 한 명을 선택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리고 또 하나는 예수님의 부활하의 증인이 될 자를 선택하자고 제안했으니, 이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을 직접 목격한 자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 예수님 곁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직접 눈으로 목격한 자들 중에 다른 새 사도를 선출하게 된 것이다. 그러자 두 명이 천거되었는데, 한 사람은 '요셉'이었고 또 한 사람은 '맛디아'였다. 그런데 요셉은 그 이름이 여러 개였다. 하나는 '바사바(바르사밧)'였다. 이는 '바르'라는 단어 '아들'과 '샤밧'이라는 단어 '안식일'이 서로 합쳐진 말로서, 히브리어로는 그 뜻이 '안식일의 아들'이다. 그리고 '유스도'도 그의 이름이었는데 이는 로마식(라틴어) 이름으로서 '의로운 자'라는 뜻이다. 그리고 요셉은 그의 히브리식의 이름이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이 천거되었으니 그는 바로 '맛디아'였다. 그 이름의 뜻은 "여호와의 선물"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맛디아에 대해서는 더 다른 자료들이 없다. 다만 알려진 바에 의하면, 그는 에디오피아로 가서 선교하였고 거기에 순교했다고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그는 현재 천국에서 높은 지위의 보좌에 앉아 있다. 그러므로 우리도 천국복음 전파에 늦게 합류했든지 아니면 처음부터 합류했든지 상관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에 최선을 다해 살아가나면 주님 앞에 섰을 때에 나도 칭찬을 들을 수있는 성도가 되어있을 것이다. 

 

7. 나오며

  가룟유다의 죽음처럼 안타까운 죽음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가룟유다가 자기 스승을 자기 나름대로 일깨우기 위해 어떤 작전을 벌인 것 같은데, 그만 그 일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자, 그는 자책감에 못이겨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렸기 때문이다. 다만 그에게 아쉬움이 남는 것은 아직 예수께서 살아계실 때에 그분 앞에 나아가 자신의 잘못을 고하고 그분의 처분을 기다렸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아마도 사탄이 들어가서 그런 것 같다). 오히려 자신의 죄만을 자책한 나머지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는 비참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죄를 짓고도 그냥 뻔뻔스럽게 살아가고 있는 오늘날의 우리들의 모습보다는 더 양심적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잘못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오신 목적, 곧 그분이 자신의 목숨을 우리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려고 한 것이 아무 소용없는 일이 되기 따문에. 우리는 어떤 죄를 지었더라도 주님 앞으로 나아가 죄를 고백하고 그분의 처우를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아니 그렇게 해야만 한다. 그래야 주님의 죽음이 의미가 있게 되기 때문이다. 주님의 피의 가치를 더 높아지기 때문이다. 가룟유다는 죽었다. 그런데 그가 어디로 갔는지 성경에서는 명확하게 나와 있지는 않다. 다만 그는 자기 자신의 자리 안으로 가기 위하여 옆으로 걸어갔던 것만큼은 확실하다. 그러므로 그의 운명은 최소한 '성밖'으로 보이며, 더 크게 보면 '불못'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주장이 맞는 주장인지는 나중 새 예루살렘 성안(천국)과 성밖(지옥의 일부분) 그리고 지옥(완전지옥)으로 가서 확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2022년 06월 12일(주일)

정병진목사

 

 

삼손은 과연 천국에 들어갔을까? 그는 정말 자살해 죽은 자에 해당하는가? 자살한 자는 100% 지옥에 떨어진다고 하는데, 그게 정말 사실인가? 그리고 과연 어떤 사람이 자살에 취약한가? 귀신들은 어떻게 사람에게 주로 공격하고 침투해 들어오는가? 귀신들이 침투해들어오는 경로는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자살을 예방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죽은 다음에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 이것에 대한 해답이 여기 들어 있다.

2020-02-16(주일) 주일오후찬양예배
제목: 삼손은 과연 천국에 들어갔을까?(삿16:23~31)



1. 들어가며

  이스라엘의 12번째 마지막 사사였던 삼손은 과연 천국에 들어갔을까? 어떤 사람은 그가 자살해 죽었으니 지옥에 갔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정말 그는 자살하여 지옥에 떨어진 것일까? 그리고 삼손을 잠깐 놔두고, 만약 누군가가 자살을 했다면 그 사람은 구원받을 수가 있는 것인가? 왜 자살한 사람은 100% 구원받을 수 없다고 이야기할 수가 있는 것인가?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삼손이 구원받고 천국에 들어갔는지 그 이유를 살펴보면서, 사람은 과연 어떻게 해야 구원받을 수 있으며, 왜 자살은 100% 지옥에 가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삼손은 누군가?

  삼손은 구약성경 가운데 사사기서에 맨 마지막으로 나오는 사사다. 그는 사사기에 나오는 12명의 사사들(옷니엘, 에훗, 삼갈, 드보라, 기드온, 돌라, 야일, 입다, 입산, 엘론, 압돈, 삼손) 가운데 맨 나중에 나오는 12번째 사사인 것이다. 여기서 "사사"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솨파트"라는 말로서, 우리말로는 "[재]판관"이라는 뜻이다. 즉 심판하고 재판하는 이를 가리킨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사사는 재판만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여호수아 이후부터 사울이라는 초대왕이 출현하기까지,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인도하고 구원해내었던 인물을 가리킨다. 즉 이스라엘 민족이 죄를 짓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징계하셨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구원해달라고 부르짖어 기도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사사들을 보내 이스라엘을 주변의 민족들로부터 건져내게 하셨다. 그런데 이러한 사사들은 사울왕이나 다윗왕처럼 베냐민지파 혹은 유다사람으로 국한되지는 않았다. 이스라엘의 12지파들 중에서 고루 나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사들 중에서 삼손사사는 단지파에서 나온 사사로서, 블레셋족속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건져내었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삼손은 좀 특이한 사사였다. 그는 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나실인이었기 때문이다(삿13:5). 나실인으로 유명한 성경의 인물은 삼손 말고 사무엘이 있다. 여기서 "나실인"이란 원래는 어떤 직책을 수행할 자격이 없지만 자기자신을 거룩히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림으로, 그 기간동안 거룩히 쓰임을 받는 사람을 가리킨다. 사무엘도 역시 나실인이었는데, 그는 제사장이 될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레위지파 사람이 아니라 에브라임지파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나실인으로 구별되어 제사장이 되었고 나중에는 대제사장의 직무와 왕과 선지자의 삼중직을 수행했던 인물이 되었다. 그러므로 삼손이 나실인이 되었다는 것은 그는 사사나 왕직을 수행할 수 없는 사람이었는데, 하나님께 구별되어 그 직분을 맡은 자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나실인이 될 때에는 꼭 지켜야 할 규례들이 있었다. 그것으로는 첫째,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아야 했다(민6:3). 둘째, 구별하는 날동안 삭도를 대지 말아야 했다(민6:5). 머리카락을 잘라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셋째, 자기 몸을 구별하는 날동안 시체를 가까이 해서는 안 되었다(민6:6). 그것은 자기의 부모나 형제자매가 죽을지라도 지켜야할 규례였다. 그런데 삼손도 날 때부터 그렇게 구별된 사람이었다(삿13:4~5).  

 그러나 사실 삼손은 음란한 사람이었다. 여자에 약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결국 여자에 걸려넘어져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놀라운 장수같은 힘을 잃고 말았다. 그가 얼마나 힘이 세든지 사자를 염소새끼를 찢음같이 찢어서 죽일 수 있었고(삿14:6), 나귀의 턱뼈로 블레셋 사람 1,000명을 한꺼번에 죽일 때도 있었다(삿16:15). 그런데 여자에 약한 것은 다윗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그만 여자에 넘어가고 말았다. 그,렇다. 기도할 사람이 기도하지 않고, 정신 바짝 차려야 할 사람이 정신 바짝 차리지 않고 있으면, 한 순간에 음란 미혹에 넘어가버릴 수가 있다. 삼손도 여자에게 약했다. 그에게는 적어도 3명의 여자가 있었음을 알 수 있으니, 그는 일종의 여성편력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첫번째의 여자는 딤나의 무명의 여인이었고(삿14:1~20), 두번째는 가사의 기생이었으며(삿16:1~3), 세번째는 소렉골짜기의 들릴라였다(삿16:4~22). 그런데 셋 다 블레셋 여자들이다.

 

3. 자살이란 무엇이며, 자살한 사람은 왜 천국에 못 들어간다고 하는 것인가?

  어떤 사람은 삼손이 자살해서 죽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삼손은 정말 자살했을까? 이 대답을 하기 전에 우리는 "자살"이 무엇인지부터 잠깐 정리할 필요가 있다. '자살'이란 자기자신을 살해하는 것으로서, 십계명에서 제6계명을 어기는 살인죄에 해당한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함부로 자기 멋대로 끊어버리는 중대한 범죄를 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살한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전부 다 지옥에 떨어지는가? 그들 중에는 천국에 들어가는 자들도 더러 있는가?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그것은 100% 지옥(불못)에 들어간다. 왜냐하면, 우선 자살도 일종의 살인죄로서 십계명을 어긴 죄를 지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살은 남을 살해한 것이 아니라 자기자신을 살해한 것이다. 그런데 관건은 살해한 후에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돌이켜 회개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자기자신을 이미 죽여놓았는데, 다시 자기 맘대로 살아날 수는 없지 아니한가! 그러므로 자기자신을 살해한 살인죄에 대해서는 용서받을 방법이 더이상 없다. 회개는 육체가 살아 있을 때에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고로, 자살하면 이유여하를 막론하여 100%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는 자신이 지은 살인죄를 결코 회개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성경에서도 살인죄는 불못에 떨어지는 죄라고 분명히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계21:8, 22:15).

  우리는 성경에서 자살한 3명의 인물을 발견하게 된다. 구약성경에 2명이 있다. 먼저는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이 있다(삼상31:5). 그는 자기 칼에 엎드려져 죽었다. 그리고 둘째는 다윗의 셋째아들로서 아버지께 반역했던 압살롬에게 붙어서 사사가 되었던 인물로서 "아히도벨"이 있다(삼하17:23). 그는 목매어 자살했다. 그리고 신약성경에도 1명이 있다. 그는 예수님의 12제자들 가운데 하나로서, 돈궤를 맡았던 "가룟유다"다. 가룟유다도 아히도벨처럼 목매어 자살해 죽었다(마27:3~5). 사도행전에 보면, 유다는 자기의 곳으로 갔다고 되어 있다(행1:25). 이는 그가 지옥에 떨어졌다는 것을 완곡하게 표현한 말이다. 자실은 자신의 영혼을 더 큰 비극으로 인도할 뿐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가룟유다의 자살이다. 그는 스승을 은30에 팔아넘긴 죄를 깊이 뉘우쳤다. 하지만 그러한 죄라도 예수님께 아뢰면 용서받을 수 있다는 속죄를 믿지 못했다. 자기의 죄를 자기가 감당한 것이다. 그런데 죄삯은 원래 무엇인가? 그것은 곧 사망이다(롬6:23). 그는 자기의 죄를 자기가 책임지므로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의미를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그는 예수님의 속죄를 믿으면 자신의 죄가 용서받는다는 것을 믿지 못했던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어떤 사람은 가룟유다가 하나님의 말씀 곧 은30에 자기의 목자를 팔 것이라는 스가랴서의 예언의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갔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이는 어불성설이요 궤변이다. 왜냐하면 좀전에도 언급했지만 자기가 자기를 죽인 다음에는 회개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자기자신을 살인한 것에 대한 죄값을 자기가 담당해야만 하는 것이다. 고로 가룟유다는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주로 어떤 사람이 자살하는가? 자살은 주로 우울증에 시달린 자들 중에 많이 발생한다. 왜냐하면 우울증이야말로 귀신이 잡아쓰기에 아주 좋은 환경이기 때문이다. 그럼, 우울증에 잘 걸리는 자는 주로 어떤 사람인가? 그들은 대체로 고집이 세고,자기주장이 매우 강하다. 그리고 자존심도 강하며, 남한테 지기 싫어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러다가 잘 안 되면 절망하고 절망하다가 자기를 비하하고 열등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러면 살고 싶은 욕망이 그만 사라지고 만다. 그때에 귀신이 슬쩍 접근해온다. 귀신이 자살하라고 그 사람에게 생각을 불어넣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보다도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지키도록 노력해야 한다. 무릇 지킬만한 모든 것보다 더욱 자기의 마음을 지키라고 잠언기자는 말했기 때문이다(잠4:23).

 

4. 삼손은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갔는가? 그 근거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과연 삼손은 천국에 들어갔을까? 우선 사사기를 읽어보면 그는 자살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이스라엘의 원수, 하나님의 원수를 갚다가 죽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블레셋 사람들은 이방신인 다곤신을 섬기는 자들로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40년동안이나 괴롭혔기 때문이다. 고로 그의 죽음은 이스라엘을 블레셋으로부터 구원해내기 위한 의로운 죽음이었던 것이다. 그는 세상을 살기가 싫어서 자기의 목숨을 끊어버린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나실인으로 세운 목적에 따라 살다갔던 인물이다. 그리고 둘째로 그는 회개한 자였다. 그가 마지막으로 기도한 내용을 보라. 그는 그동안 자기가 잘못 살아왔음을 회개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한 번만이라도 살 수 있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청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에게 힘을 준 것이다. 이스라엘의 원수, 하나님의 원수를 갚으라고 그에게 힘을 준 것이다. 그래서 블레셋신전을 받치고 있는 기둥을 무너뜨릴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죽기 전에 회개하고 죽은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갔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것은 성경을 통하여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오직 믿음으로 살다간 인물들이 나열된 히브리서 11장에 그의 이름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히11:32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우리는 히브리서 11장을 통하여 구약의 인물들 가운데 믿음으로 살다가 오직 메시야를 믿고 회개하여 하나님의 도성인 천국에 이른 자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한 영광스런 사람들로는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사라, 이삭, 야곱, 요셉, 모세, 기생라합,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사무엘 등이 있다. 이들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었던 자들로서, 하늘에 있는 더 좋은 것들을 선물로 받은 자들이다(히11:39).

 

5. 나오며

  삼손은 자살한 것이라면 전쟁터에 나가서 자기동료를 살리려고 뛰다가 죽은 자도 다 자살한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적을 공격하다가 죽은 것은 자살이 아니다. 그리고 삼손은 마지막에 가서 하나님을 찾았고 회개했다. 그는 그가 사사로서, 나실인으로서 마땅히 걸어가야 할 길을 걸어가지 못했음을 고백했다. 여자를 하나님보다 더 중하게 여겼던 것을 회개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간절히 구했다.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했던 것이다(삿16:28). 그리고 그가 그때 죽인 사람들은 살아있을 때보다 더 많은 블레셋 사람들을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어주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죽기전에 회개하라. 이것이 구원의 최대의 관건인 것이다.

 

2020년 2월 16일(주일)

정병진목사

스가랴는 구약의 17개의 선지서 중의 하나이지만 퍼센트로 따지면 가장 많은 메시야 예언을 담고 있는 책이다. 책은 14장에 불과한데 무려 18가지의 메시야 예언을 쏟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스가랴서의 메시야 예언은 그분이 누구시며 무슨 일을 하실 것인지에 관한 내용들인데, 그중 스가랴 9~13장에서는 메시야의 공생애 가운데 마지막 한 주간의 삶이 빼곡히 예언되어 있다. 그 예언들은 대체 무엇이며 어떻게 성취가 되었을까?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는 또한 어떤 의미가 있는가?

2019-12-18(수) 수요기도회
제목: 스가랴강해(03) 스가랴서에 나오는 메시야의 약속은 무엇인가(2)(슥9:9~10)
https://youtu.be/jvRncmtynfk


1. 들어가며

  스가랴서는 예언서이지만 묵시서라고도 한다. 왜냐하면 스가랴서의 전반부에 8가지 환상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스가랴서는 메시야에 관한 예언이 다른 선지서들에 비해 탁월하게 많이 들어있는 예언서다. 1장에서 14장 사이에 총 18가지나 되는 메시야 예언이 들어 있으니, 이사야서 다음으로 메시야의 예언이 많이 들어있는 책이며, 퍼센트로 치자면 스가랴서는 구약의 선지서들 가운데 가장 많은 메시야의 예언을 담고 있는 책이라고 하겠다. 그렇다면 스가랴서에는 과연 어떤 메시야의 예언이 들어있는 것일까? 우리는 지난 주에 이어서 계속해서 메시야 예언을 계속 들여다보고자 한다. 그중에서 오늘은 스가랴 9장에서 13장까지 들어있는 메시야의 공생애에 관한 예언을 집중적으로 다뤄보고자 한다.

 

2. 스가랴서의 구조는 어떻게 생겼는가?

  스가랴서는 총14장으로 구성된 예언서인데, 내용면에서 본다면 예언의 내용이 확연하게 다른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전반부 1장~8장까지는 성전공사의 독려를 위한 예언이 수록된 반면에, 후반부인 9~14장은 메시야의 오심을 통한 메시야왕국의 도래 예언이 수록되어 있다. 시기적으로 볼 때에도 두 부분은 약 40년간의 시간차를 가지고 있다. 즉 전반부 1장~8장까지는 B.C.520년에서 518년에 주어진 예언을 다루고 있다면, 후반부 9~14장까지는 B.C.480~470년에 주어진 예언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내용상 전반부인 스가랴 1~8장은 다시, 서론(슥1:1~6) 말씀과 8가지 환상이 기록된 부분(슥1:7~6:15)과 금식일에 관한 질문과 답(슥7:1~8:23)으로 나누어 볼 수 있으며, 후반부인 스가랴 9~14장은 다시 초림의 메시야 예언이 기록된 9~13장의 말씀과 다시 오실 재림의 메시야 예언이 기록된 14장으로 나눠볼 수 있는데, 오늘 이 시간에는 9~13장에 나오는 초림의 메시야 예언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3. 스가랴서에는 어떤 메시야의 예언들이 있으며, 초림의 메시야 예언은 무엇인가?

  스가랴서에는 메시야에 관한 예언으로 첫째, 메시야의 신분에 관한 예언(1~8장)둘째, 메시야의 공생애에 관한 예언(9~13장)이 있으며, 마지막으로 셋째, 메시야의 재림에 관한 예언(1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에서 오늘은 메시야의 공생애에 관한 예언(9~13장) 8가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스가랴 선지자는 초림할 메시야의 예언 중에서 공생애 끝에 있는, 마지막 한 주간에 있을 메시야 예언을 주로 언급했다. 그것은 메시야가 나귀의 새끼를 타고 입성하는 모습을 필두로 하여, 선한 목자로 오셨으나 결국 멸시와 천대 가운데 배척을 받으시고, 은30에 팔리시어 죽게 되시는데 찔려 사망할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다. 그리고 몸값 은30은 이내 다시 토기장이의 밭을 사는 데 쓰여질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선한 목자인 메시야가 죽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목자를 치시기 때문이라고 언급하심으로 메시야는 홀로 고난을 감당할 것임을 분명히 예언하고 있다. 이것이 메시야의 공생애 예언의 중요 골자다. 이제부터는 메시야의 공생애에 관한 8가지 예언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초림의 메시야는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겸손한 왕이심이 예언되어 있다(슥9:9). 이 예언을 따라 예수께서는 공생애 마지막 주간에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마21:1~17, 막11:1~11, 요12:15). 그렇다. 예수께서는 정치적인 메시야로 오신 것도 아니요, 군림하기 위해 오신 메시야가 아니다. 왜냐하면 메시야의 왕국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요18:33~37). 그리고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을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소개하셨다. 그러니 "내게 와서 배우라"고 하셨다(마11:29). 그분은 원래는 창조주요 하나님이셨지만 자기를 비우시고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셨다. 우리는 겸손한 왕이시다. 그리고 그분은 공평하시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내놓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겸손을 배워야 한다.

  둘째, 초림의 메시야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과의 싸움 그리고 이방인들과 싸움을 끝내시고 평화를 가져오시되, 땅끝에서 땅끝까지, 유브라데 강에서 땅끝까지 평화를 가져오실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다(슥9:10). 스가랴선지자는 장차 오실 메시야는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전쟁을 종식시킬 것이고,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싸움을 끝내실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가 평화를 이루실 장소는 땅과 강 모두라고 했다. 이 예언에 따라 예수께서는 평화의 왕으로 오셨다. 그러므로 그가 태어나실 때에도 천사들이 노래하기를 "하늘에는 영광이요 땅에는 평화로다(눅2:14)"이라고 노래했다. 정말 그분은 오셔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을 없애셨다. 그리고 이방인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해주셨다(마8:10). 그래서 그분은 우리(울타리)에 들지 아니한 양들을 인도하여서 한 목자에게 있게 하시겠다고 약속을 그래도 이행하셨다(요10:16). 사도바울도 예수께서 오셔서 이방인과 유대인 그리고 하나님과 죄인들 사이의 막힌 담을 헐고 평화를 가져다 주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시 원수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엡2:14)"

  셋째, 초림의 메시야는 잡혀 죽임당할 가련한 양떼를 먹이기 위한 선한 목자로 오실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다(슥11:4,7). 스가랴선지자는 메시야가 오실 때에 양떼들의 형편은 가련한 상태가 될 것이라고 했다. 양떼를 사들인 자도, 팔아버린 자도, 목자들도 양떼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슥11:5).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내살 목자는 그러한 양떼들을 진정으로 돌보실 선한 목자라고 하셨다. 그리고 선한 목자로서 진짜 예수께서 오셨다. 예수께서는 선한 목자로서 자신의 목숨을 양떼를 살리기 위해 내놓으셨다(요10:11~15).  

  넷째, 초림의 메시야는 나중에는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에 의해서 멸시와 미움을 받게 될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다(슥11:8). 이때 스가랴 선지자는 양떼를 먹이기 위해 온 선한 목자를 양떼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히려 배척하고 미워하고 멸시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이 예언에 따라 결국 예수님은 3년반동은 그동안 아끼고 사랑하셔서 치료해주시고 귀신을 쫓아주었던 사람들에 의해 배반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게 된다. 왜냐하면 당시 유대사회는 이미 기득권세력에 의해 점령당해 있었기 때문이다. 율법교육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었고, 성전제사는 사두개인들과 대제사장들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었다. 하지만 율법교사 위에 교사로 오신 예수께서 오셔서 율법을 제대로 해석해주셨고, 성전제사를 이익의 수단으로 삼고 있는 성전매매상과 환전상을 성전에서 내쫓아내셨다. 그러자 그들은 분노했고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한다. 결국 이 예언에 따라 예수께서는 종교지도자들의 선동을 받은 백성들에 의해(내면에는 사탄마귀의 조정에 의해) 배반당한 채 멸시와 천대와 미움을 받으시고 죽임을 당하시게 된다(마22:22,39~43).

  다섯째, 초림의 메시야는 은 30개에 팔리게 될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다(슥11:12). 이것은 스가랴선지자가 선한 목자로서 자신이 백성으로부터 배척을 당할 때에 그동안 일한 댓가를 백성에게 달라고 했더니 그들이 은30개를 달아서 품삯으로 주었다는 말씀이다. 이에 따라 예수께서도 가룟유다에 의해 대제사장들에게 팔리는데, 그때 대제사장들은 은30을 달아서 그에게 주었다(마26;15). 그러나 예수님의 몸값은 얼마나 되는 것인가? 당시 은30은 노동자의 넉달치 품삯에 해당한 것이다. 이는 남자 노예가 동물에게 받쳐 죽게 되었을 때에 물어내야하는 몸값에 불과하다.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 노예처럼 취급을 받은 것임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아들의 목숨값은 사실 인류가 계산할 수 없이 고귀한 것인데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노예만도 못한 사람으로 팔아버린 것이다.

  여섯째, 초림의 메시야를 샀던 은30이 토기장이에게 던져질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다(슥11:13). 이에 스가랴 선지자는 백성이 자신에게 준 몸값 은30을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토기장이에게 던져버린다. 이 예언을 따라 나중에 가룟유다도 자기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한 사실을 알고 자신이 받았던 은30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주지만 그들은 받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그것을 성소에 던져넣고는 자살해버린다. 그러자 대제사장들이 이것은 '피값'이라고 하면서 성전고에 넣어둠이 합당하지 않다고 하면서 의논한 후 그것으로 토기장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로 삼는다. 그리고 그것을 '피밭'이라고 불렀다(마27:3~8, 행1:18~19). 이에 메시야가 은30에 팔리는 것 뿐만 아니라 그것을 토기장이에게 던지라는 예언은 그대로 성취되었다(마27:9~10).

  일곱째, 초림의 메시야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찔림으로 고난받을 것이지만 나중에는 자신의 행위 때문에 독자와 장자를 잃은 슬픔으로 통곡할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다(슥12:10). 이 예언을 따라 예수께서는 머리에 가시면류관으로 찔림을 당하셨고(마27:29), 로마군병들에 의해 채찍질을 당하셨으며(마27:26, 요19:1), 손과 발이 못에 찔리셨다(마27:35, 요19:18). 그리고 죽으신 후에는 로마군병이 창으로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요19:34). 한편 스가랴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장차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은총과 간구의 영(성령)을 부어주실텐데 그러면 그들이 자신이 행한 일 때문에 애통하고 통곡하기를 독자와 장자를 잃은 슬픔처럼 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랬더니 정말로 예수께서 죽으신 후 50일 뒤 오순절날,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던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메시야를 자기들의 손으로 죽였음을 시인하면서 통곡하고 회개하게 된다(마2:37~41). 그리하여 그날 예수님을 영접하고 세례받은 이가 3천명이나 된다. 더불어 이 예언은 마지막 날에 또 한 번 성취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에는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쳐다보게 될 터인데, 그때 가서 자기들이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을 핍박하고 죽인 죄 때문에 가슴을 치며 한탄하겠지만 그때는 그 어떤 통곡도 그들을 지옥의 형벌로부터 면해주지는 못할 것이다(계1:7). 그러므로 회개하려면 지금 회개해야 한다. 그날에 회개하면 때는 늦다.  

  여덟째, 초림의 메시야인 선한 목자를 하나님께서 내치심으로 양떼들은 흩어질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다(슥13:7).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목자를 당신이 쳐서 내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그때에는 양떼들이 흩어질 것이라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 예언에 따라 예수께서는 성찬식을 마치신 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으니라(마26:31)" 그리고 얼마 후 제사장들이 보낸 무리들이 칼과 몽치를 가지고 예수를 잡으러 왔을 때에, 베드로가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잘라버렸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자제시키면서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 하겠느냐(요18:11)"고 하시고는 스스로 잡혀가셨다. 그러자 모든 제자들이 도망쳐 흩어지고 말았다.

 

4. 나오며

  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세주라고 믿는가? 그분 스스로가 "나는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며 구세주"고 말씀하셨기 때문인가? 아니다. 그렇게 누구든지 주장할 수는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거짓말을 지어서 말로만 내뱉었던 분이 아니었다. 그분은  실제 구약의 예언을 따라 사셨기 때문이다. 즉 예수께서는 자신이 이 세상에 출현하기 4,000년전부터, 하나님에 의해 보냄받은 자에 대한 약속대로 그대로 오셨고 또한 그렇게 사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메시야로 믿는 것이다. 놀라지 말라. 오실 메시야에 관한 구약의 예언은 무려 350가지 이상이 된다. 그런데 예수께서 오셔서 그많은 예언들을 고스란히 성취하신 바 되셨기에, 우리는 예수님을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이며 나의 구세주로 믿는 것이다. 그러한 메시야의 예언들 가운데 예수께서 나귀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 4일 후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기까지의 예언들이 스가랴 9장에서부터 13장에 걸쳐 집중적으로 나타나 있다. 그리고 그대로 성취된 것이다. 참으로 놀랍기만 하다. 스라갸선지자는 B.C.500년경의 예언자인데, 성령의 감동하심을 따라 500년 뒤에 오실 메시야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그대로 예언했던 것이다. 특히 마지막 공생애 4일간에 일어날 8가지의 예언을 그는 우리에게 기록으로 남겨둔 것이다. 모든 것을 우리를 위해 다 행하신 우리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2019년 12월 18일(수)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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