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1-22(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아담성의] 회복, 그 진정한 뜻은 무엇인가(창1:26~28)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Xop6ncpmnWI [또는 https://tv.naver.com/v/32647022]

 

1. 들어가며

  이 시대는 마지막 시대다. 주님 앞에 어떤 모습으로 설 것인가를 준비해야 하는 시대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어떤 사람을 이 마지막 시대에 사용하시는 것일까? 그것은 시대에 부여하신 사명을 깨닫고 그것을 감당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하늘나라에서 받을 기업을 위해 지금 이 시대에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에 충성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정결해야 하고, 은혜를 나눠줄 줄 알아야 하며, 영적 수준을 높이는 자라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시대에 우리의 영적 수준을 어느 정도까지 기대하시는 것일까? 과연 우리가 온전히 회복이 된다면 우리는 어느 정도 수준까지 올라갈 수 있는 것인가?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회복이란 어떤 것이며, 어느 정도의 수준을 가리키는 것이며, 온전한 회복을 위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했던 아담은 어떤 수준이었는가?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 만물을 엿새 동안 창조하셨다. 그중에 인간은 맨 마지막날 해가 넘어갈 무렵에 창조하셨다. 그런데 사람의 창조는 다른 창조와는 다른 것이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육적인 피조물로만 창조하지 아니하시고, 영적인 피조물로도 창조하셨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오직 온 우주 가운데 사람만이 영을 가진 존재로서 영으로서 하나님과 교통이 가능한 존재로 창조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의 영적 수준은 어떠했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던 예수님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사람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인 그리스도를 모델로 해서 창조했기 때문이다(고후4:4, 골1:15). 즉 창조된 아담의 수준은 예수님 수준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3.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된 인간의 수준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인 예수님 수준으로 창조되었다고 하는 것은 어떤 뜻인가? 그것은 다음과 같은 3가지 측면에서 그 수준을 헤아릴 수 있다.

  첫째, 아담은 하나님의 종류로 창조되었기에, 그 지혜와 능력이 무궁하다는 것이다(창1:26~28). 사실 모든 식물이나 동물들은 각기 자신의 종류대로 창조되었다(창1:24~25). 그런데 사람은 사람의 종류대로 창조되지 않았고, 하나님의 종류대로 창조되었다. 장차 인간이 천국에서 예수님처럼 살게 하려 그렇게 창조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지식과 지혜는 대단한 것이었다. 그래서 첫째 아담은 사람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알 수 있었다. 마치 육신을 입으셨던 둘째 아담이신 예수께서 나다나엘의 과거를 아시고, 베드로의 미래를 아신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고 있던 여인이 자신의 옷가를 만졌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모습도 속사람(영)이 육체보다 더 빛나는 상태로 창조되었다.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는 벌거벗었으나 몸에서 나오는 빛 때문에 자신이 벌거벗고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였다. 

  둘째, 아담은 이 땅과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을 지배할 수 있는 왕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사람은 모든 피조물 중에 맨 마지막으로 창조된 고등 생명체다.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모든 만물을 다스리고 지배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셨다(창1:28). 그러므로 타락하기 전 아담은 모든 만물 위에 있는 왕적 존재였다. 모든 만물이 그의 음성을 듣고 그의 음성에 순종해야 했던 것이다. 이는 마치 육체를 입고 오신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남의 나귀를 자신의 나귀처럼 가져다가 쓰실 수 있는 것과 같다. 사실 아담은 모든 동물과 식물의 이름을 지어 주었다(창2:19~20). 아담이 그것들의 이름을 지어 주었다는 것은 그것의 주인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모든 만물들은 자신의 왕이 누군지를 알아보았고 아담의 말에 순종했던 것이다. 만약 아담이 화가 나서 무화과를 저주했더라면 그때 무화과도 역시 뿌리채 말라 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뱀에게 떠나가라고 명령하면 에덴동산에서 나가야 했을 것이다. 뱀은 아담이 다스릴 수 있는 권한 안에 있는 생명체였기 때문이다. 

  셋째, 사람은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사람은 특별했다. 육체적인 몸만 가진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영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육체의 몸과 그리고 영혼의 몸 즉 2가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육의 눈으로는 자연 만물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영의 눈으로는 영적인 세계를 볼 수 있었다. 하나님을 빛처럼 볼 수 있었고, 천사도 사탄 마귀도 다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천국도 볼 수 있었고 지옥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영의 귀가 열려 있었다. 그러므로 아담은 영의 귀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창3:8,10). 그것은 타락 후에도 얼마까지는 계속해서 영의 귀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과 대화가 가능했던 것이다. 그런데 아담이 뱀의 말을 듣고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인하여 영의 눈은 점차 닫히게 되었고 육의 눈은 더 열리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때부터 아담과 하와는 자기들이 벌거벗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는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었던 것이다. 

 

4. 아담은 어떻게 되어서 영적인 감각과 능력을 잃어버렸는가?

  그렇다면 아담은 어떻게 되어서 이 엄청난 영적 능력을 상실하게 되었는가? 그것은 선악과를 따먹어서 그렇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창조하신 뒤에, 동쪽에 있는 에덴이라는 곳에 동산 하나를 창설하셨다. 그리고 그곳에 모든 종류의 나무들이 나게 하셨다. 그런데 동산의 한 중앙에는 생명나무를 두셨다. 그런데 그것과 가까운 곳에 선악과가 있었다. 그런데 생명나무는 특이한 나무였다. 왜냐하면 하늘로부터 생명수가 공급되어 자라고 있는 나무였기 때문이다. 그렇다. 생명나무는 이 땅에 속한 나무가 아니었던 것이다. 영적인 나무였던 것이다. 이 나무는 하늘에 있던 것이었는데,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창설하시고 그곳에 가져다 심어 놓은 것이었다. 그래서 이 나무는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수를 마시고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하나님께서 이 생명나무를 에덴동산에 두신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아담이 그 열매를 따먹고 영생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아담은 이 나무의 열매를 따먹기 전에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죄를 짓고 말았다. 그러자 죄를 지은 상태에서 영원히 살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에서 아담을 추방시키셨다. 그리고 노아의 홍수 전에 생명나무를 하늘로 올려가셨다. 그래서 지금 이 생명나무는 천국에 있다. 

  문제는 선악나무다. 선악의 지식의 나무는 어떤 나무였는가? 이것은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나게 하신 평범한 나무였다. 하지만 마귀가 이 나무를 변조시켜 놓았다. 사탄 마귀는 원래 일반 나무의 열매에다가 자신의 악한 영들(뱀들)을 이용하여 선악나무의 열매로 만들었던 것이다. 보기에는 생명나무의 열매와 비슷해 보였지만 뱀들이 그 나무의 열매들을 둘러싸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아담과 하와가 이 열매를 먹게 된다면 평범한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그 열매를 둘러싸고 있는 악한 영들(뱀들)을 먹게 되는 것이었다. 이는 마치 제사상에 올라 있는 음식을 먹게 되면 음식을 둘러싸고 있는 악한 영들을 같이 먹는 구조와 같다. 그런데 그만 하와가 먼저 뱀의 꾀임을 받아 이 나무의 열매를 먹고 말았고 그의 남편인 아담에게도 주자 아담도 그것을 먹고 말았다. 그리하여 사람의 몸속에 사악한 영들인 뱀들이 치고 들어오게 되었다. 그리하여 영적인 감각은 어두워지기 시작하였고 육의 눈은 더 밝게 열려지기 시작했다. 타락 직후에는 그래도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 충만히 있었으나 자손으로 내려갈수록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은 희미해져 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사람들은 영의 눈이 닫혀 있고 영의 귀가 막혀 있어서, 빛이신 하나님을 볼 수도 없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도 없게 되었다. 그리고 동식물에 대한 지배권도 상실하여 자연 만물에게 무슨 명령을 한다 할지라도 자연 만물이 복종하는 것은 흔하지 않다. 그리고 귀신에게 명령해도 귀신이 말을 잘 듣지 않는 것이다. 

 

5. 죄짓기 전의 아담으로 회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사람이 죄짓기 전의 아담의 영성으로 회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선악과를 통해서 들어온 악한 영들을 내 몸에서 내보내면 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첫사람인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음으로 악한 영들을 받아들였지만, 그 후에는 사람이 범죄할 때마다 뱀들이 몸속에 치고 들어오게 된 것이다(창3:14). 왜냐하면 아담의 범죄 후 뱀에게 "너는 흙을 먹고 살리라"고 하셨는데, 여기서 흙은 '아파르'로서 사람의 몸의 재료에 해당한다(창2:7). 그러므로 뱀은 지금도 사람이 범죄하면 사람의 몸속에 들어와서 살 수 있다. 그러므로 선악과를 통해서 몸속에 들어온 영들과 자신의 범죄로 인해 또 불러들인 뱀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의 몸은 더럽혀진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악한 영들로 인해 더럽혀진 몸을 예수님의 피로서 반드시 씻어내야 한다. 그것은 바로 회개하는 것이다. 회개할 때에 예수님의 피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악한 영들을 몰아내어 내 몸을 깨끗하게 청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왜 예수님을 믿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저주가 끝나지 않고 있으며, 죄짓기 전의 아담의 영성으로 회복되지 아니한가? 그것은 우리 몸 안에 침투해 들어온 악한 영들을 내보내지 않아서 그렇다. 어떤 사람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자신의 모든 죄가 용서되었으니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구약시대 대제사장이 1년에 한 번 드리는 대속죄일 제사에 참여했다고 해서 1년 동안 자신의 지은 죄가 다 용서될 수 있었겠는가? 만약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개인이 범죄했으면 개인은 반드시 속죄제사를 드려야 용서받을 수 있다. 하지만 그중에 얄팍한 사람이 있어서 자신의 개인 속죄제사는 한 번도 드리지 않고 1년에 한 번 속죄일 제사에 참여했다고 해서 자신의 죄를 다 용서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사실 예수께서 골고다의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대속죄일 제사를 드린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을 믿었다고 해서 자신의 모든 죄가 다 사함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개인도 낱낱의 죄를 회개해서 깨끗함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게 되면 대부분의 성도들은 회개생활을 등한히 여긴다. 이미 다 용서받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 안에 이미 들어와 있는 악한 영들은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그것은 오직 한 가지 우리가 회개함으로 그 악한 영들을 내 몸에서 내보낼 수 있는 것이다. 곧 충분한 회개만이 저주를 완전히 끝내고 죄짓기 전의 아담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고로 지금 내가 아담의 수준까지 회복되지 아니한 것은 아직 충분한 회개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6. 나오며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결코 한꺼번에 내 몸 안에 있는 악한 영들이 빠져나가는 것이 아니다. 이것 때문에 그것들이 우리 몸에 있어서 온갖 저주를 불러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들 때문에 우리가 병에 걸리기도 하고, 재물을 잃어버리기도 하는 것이다. 때로는 이것이 내게 재물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도 한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온갖 사건 사고에 휘말리고 마는 것이다. 또한 내 앞길이 방해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이것들을 처리해야 한다. 그것은 오직 한 가지, 충분히 회개하는 것이다. 우리는 결코 예수께서 대속죄일 제사를 드린 것으로 만족해서는 아니 된다. 그것들은 우리가 이것을 안다고 하여 순순히 그냥 나가지 않는다. 우리의 입술로 자신이 지은 죄들을 자백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조상들의 우상숭배의 죄들까지도 회개해야 한다. 그래야 그것들도 우리 몸에서 합법적으로 떠나가는 것이다. 문제는 충분한 회개를 했느냐 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충분한 회개를 했다면 지금까지 내게 병을 주고 있는 귀신이 비로소 떠나갈 것이다. 그러면 병에서 곧바로 나을 것이다. 온갖 가난의 저주를 갖고 들어온 뱀들이 떠나가게 되니까, 가난에서도 벗어날 수가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귀신이 떠나가면 우리의 영안이 열리게 되어 영의 세계를 볼 수 있게 된다. 천사를 보고 귀신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를 돕는 천사가 어떻게 활동하는지를 볼 수 있고, 귀신들을 보고서 쫓아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에게 명령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영의 세계인 천국과 지옥도 수시로 눈을 뜨고도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아울러 영의 귀도 열리게 된다. 그러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으며,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다. 천사와도 대화가 가능하고 그들의 대화를 들을 수도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만물을 말로서 다스릴 수 있게 된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무화과나무를 하루아침에 뿌리채 마르게 할 수 있고, 물 위를 걸어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의 과거를 당겨서 볼 수도 있고, 현재의 영적 상태도 볼 수 있으며, 미래의 상태도 당겨서 볼 수 있다. 이것이 타락하기 전 아담의 영적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진정 바라는 회복은 바로 이러한 회복, 곧 아담성으로의 회복이기 때문이다. 

 

 

2023년 01월 22일(주일)

정병진목사

2023-01-08(주일) 주일낮2부예배

제목: 하나님은 왜 지금도 충성된 자를 찾고 계시는가?(마25:14-30)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mEBdMCkgz1U  [혹은 https://tv.naver.com/v/32238705]

1. 들어가며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신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시대에 하나님의 일을 할 사람과 특히 더 함께 하신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직접 함께 하시겠다고 했던 사람이 약 10명 정도 나온다. 그들은 다 그 시대에 사명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사명자로 태어났다고 해도 그들도 역시 다 사람이다. 고로 이들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것인지 말 것인지는 다 본인 몫이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는 자들에게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대체 무엇인가?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은 '충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당신에게 순종하는 사람을 찾고 계시는 것인가? 왜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에 우리에게 어떤 일을 맡기려고 하시는가? 그리고 하나님께 충성하는 사람들이 장차 받게 될 축복은 무엇인가?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충성'의 비밀에 대해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2. '충성'이란 대체 어떤 의미인가?

  국어사전에서 '충성'이란 진정에서 우러나오는 정성으로서, 보통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바치는 마음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충성이라는 말의 의미는 어떤 것인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달란트의 비유(마25:14~30)'에서 '충성'이라는 말은 '게으름'과 반대되는 단어로 쓰이고 있다. 다시 말해, 충성은 어떤 일과 관계된 것이다. 그렇다면 신약성경에서 충성이라는 단어는 어떤 단어가 사용되고 있는가? 헬라어로 '충성된'이라는 단어는 '피스토스'라는 단어이다. 그런데 이 단어는 보통 3가지 의미로 쓰인다. 그것은 '믿는, 신실한, 충성된'이라는 뜻이다. 이 중에서 가장 많은 빈도수를 차지하는 것은 역시 '믿는'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문맥상 이 단어가 '종'이나, '일꾼', '청지기'와 함께 쓰일 때에는 '충성된'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그렇다면 신약성경에서 최초로 이 단어가 '충성된'이란 의미로 쓰이고 있는 본문은 어디일까? 그것은 오늘 본문의 '달란트의 비유'와 아주 유사한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과 악한 종'의 비유이다(마24:45~51). 이 비유에 보면, '충성되다'라는 말이 어떤 의미로 쓰였는지를 짐작하게 해 준다. 그것은 첫째, 지혜 있는 것 곧 정확히 말하면 '통찰력(분별력)'이 있는 어떤 것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마24:45). 곧 지금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아는 지혜가 있으면 충성된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둘째, '때'와 관련이 깊다(마24:45)는 것이다. 여기서 '때'란 '카이로스'로서, 이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어떤 특정한 시간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지금이 어느 때인지를 아는 자가 충성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셋째, 그것은 맡김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충성된 자에게 하나님께서도 당신의 소유를 맡길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마24:47). 고로, '충성되다'는 말은 결국 '무엇인가를 맡길만 하다'는 뜻으로 귀결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라고 말했던 것이다. 

 

3.  하나님께서는 왜 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일을 맡기려고 하시는가?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일을 맡겨 주시려고 하시는가? 이것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은 일하는 자에게 아주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자신에게 일을 맡기는 주인의 의도를 종이 잘 모른다면,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책망받는 한 달란트 받은 종처럼 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은 자신에게 일을 맡긴 주인의 뜻과 의도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니 그는 주인을 아주 나쁘게 생각했다. 그것은 주인이 자신에게 일을 맡겨서 자신의 부를 축적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핑계였지만 말이다. 다시 말해,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자신에게 달란트를 맡긴 주인을 악덕 고리대금업자 정도로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이 열심히 일한 것을 다 빼앗아가는 주인을 이롭게 하기 싫었기 때문에, 자신이 받은 달란트를 그냥 안전하게 땅에 파묻어 놓았다가 이제 가져왔다고 보고했다. 왜냐하면 그는 주인을 '씨뿌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흩뿌리지 않는 데서 모으는 줄'로 알았다는 것이다(마25:24). 하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그의 주인은 자신의 종을 부려먹기 위해서 달란트를 맡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종들에게 일을 맡기려고 하시는가? 그것은 종들을 부려먹기 위함도 아니며, 말 잘 듣는 종들로 만들기 위함도 아니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 주인이 종들을 통해서 어떤 이득을 얻기 위함도 아니다. 오직 한 가지, 그것은 종들이 일을 어떻게 감당했는지를 살펴본 후 그들에게 더 큰 것을 맡기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다. 그렇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천국에서 장차 자신의 기업을 맡길 사람을 찾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하늘의 기업을 맡길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에게 얼마만큼 맡길 것인지 어떤 원칙을 정해 놓았으니, 그것이 바로 충성됨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는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4.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아담을 바로 죽이지 않으시고 왜 노동의 수고를 하라고 하셨는가?

  창세기 3장을 읽어 보면,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아담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3:19)"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따먹게 되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하셨는데, 왜 곧바로 아담을 죽이지 않고 살려 주셨는가? 그리고 죽기 전까지는 얼굴에 땀을 흘려야 한다고 말씀하셨는가? 그것은 기본적으로 풍요롭던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될 것이니, 열심히 일을 해서 먹거리를 장만하라고 하신 말씀이다. 그러나 한 가지 또 다른 의미가 있다. 그것은 노동의 수고가 단지 먹거리를 장만하는 도구만이 아니라, 장차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통해 아담을 구원하여 천국에 들어가게 하였을 때에, 그가 천국에서 받을 기업의 척도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동의 수고는 징계인 것은 맞지만 징계라고만 보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천국에서 우리가 받을 기업의 분량을 결정하는 척도로도 함께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5. 장차 천국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충성된 종들에게 무엇을 주시려 하시는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천국에서 과연 자신의 충성된 종들에게 어떤 것을 주시려 하시는가? 그것은 다섯 달란트 받아서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긴 자와 두 달란트를 받아서 또 두 달란트를 받았던 '착하고 충성된 종'에게 하신 말씀을 통해서 그 답을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천국에서 더 많은 것으로 맡겨 주시려고 그렇게 일을 맡겨 주셨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땅에서 어떤 일을 맡기신 것은 그것을 통하여 천국에서 당신의 기업을 우리에게 맡기는 척도로 쓰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주인이 자신의 종들에게 달란트를 맡기신 것은 그들이 이 땅에서 얼마나 일을 잘하는가를 미리 보시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이 땅에서 받은 달란트는 사실 우리가 천국에서 받을 기업에 비하면 너무나 작은 것이다. 때문에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에게도 주님께서는 "네가 적은 것들에 충성하였으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사실 한 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의 값어치를 갖는 큰 돈이다. 이것은 노동자의 20년치의 품삯에 해당한다. 고로 다섯 달란트의 값어치는 노동자의 100년치의 품삯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주님의 눈에는 그것이 작게 보인 것이다. 왜냐하면 천국에서 그에게 주님이 맡길 기업은 실로 어마어마하게 크기 때문이다. 

 

6. 이 땅에서 주님으로부터 무엇인가 조금이나마 달란트를 받은 자는 무엇에 주의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는 사실 각각의 모든 사람에게 달란트를 주셨다(마25:14). 한 사람도 빠짐없이 어떤 재능을 주신 것이다. 여기서 '달란트'란 그가 잘할 수 있는 어떤 능력이나 은사와 사명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주인이 자신의 종들에게 달란트를 주실 때에 아무런 기준 없이 주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분배 원칙을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자기 자신에게 속한 능력을 따라서'라고 나온다(마25:15).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의 일을 맡기실 때에는 아무 일이나 맡기신 것이 아니다. 우리가 잘할 수 있는 재능을 따라서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맡겨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에게 받은 달란트로 주의 일을 시작한다면 우리 모두는 거의 성공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남길 수가 있었고,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두 달란트를 더 남길 수가 있었던 것이다. 고로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가서 곧바로 일을 시작했다면 그도 역시 한 달란트를 더 남길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주인을 악한 주인으로 생각했다. 그는 주인을 종들에게 일이나 시켜 이윤을 취해 보려는 불로 소득자로 생각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종이 되어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려 할 때 주의할 것이 2가지가 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 우리에게 일을 맡기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 더 많은 것을 맡겨 주시기 위해 우리에게 일을 맡기셨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마25:29).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절대 악하신 분이 아니다. 우리의 노동력을 착취하시려는 분이 결코 아니시다. 그분은 우리에게 주되 더 넘치도록 주고 싶어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아무렇게나 우리에게 안겨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먼저 달란트를 주어 그 일을 하는 것을 보시고 천국에서도 우리에게 맡겨 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맡게 될 기업의 분량을 결정하시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려 할 때에는 둘째로,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 맡겨 주신 일에 성실하게 충성하는 것이다. 그리고 곧바로 그 일을 실행에 옮겨서 열심히 일하는 것이다. 생각만 하고 일을 하지 않는 것은 게으른 종의 모습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달란트가 있는가? 그러면 즉시 그것을 가지고 일을 시작하라. 그러면 그것은 우리의 능력을 따라 주님이 주신 달란트이므로 성공적으로 일을 마무리할 확률이 매우 높다. 고로 다섯 달란트를 받은 자나, 두 달란트를 받은 자가 어떻게 행동했는가? 그들은 곧바로 사명의 땅으로 떠나갔고 열심히 일하였다. 자신의 업무에 착수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주인이 준 자본으로 최선을 다해 일한만큼 또 다른 달란트를 남겼던 것이다. 

 

7. 하나님께서 열심히 일하는 충성된 자에게 주시는 상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충성된 종에게 하나님께서 준비하고 계시는 상은 대체 무엇인가? 다시 말해 충성된 종들이 받게 될 축복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3가지로 압축될 수 있다.

 첫째, 우리가 열심히 일하여 남긴 그대로를 천국에서 우리가 그대로 도로 받게 되는 것이다(마25:29).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와 결산하실 때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그대로 우리에게 갖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가 주 안에서 수고한 모든 것은 결코 헛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고전15:58). 둘째, 우리가 그날에 착하고 충성된 자로 인정을 받으면, 주님께서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맡겨 주실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하늘에서 받게 될 기업이자 상들이다. 셋째, 우리의 수고를 마치는 날에는 주인되신 하나님의 잔치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마25:21,23). 이것은 새 예루살렘 성 안의 영광의 광장에서 펼쳐지게 될 '어린양의 혼인잔치'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맡겨 주신 하나님의 일 곧 사명에 충성한 자는 최소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 우리가 충성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충성됨이 우리가 천국에서 받을 기업을 미리 준비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가 최소한 천국에 들어가서 사는 자가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주님의 말씀에 따르면, 충성하게 되면 생명의 면류관을 주신다고 말씀하셨다(계2:10). 이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 것, 곧 지옥 형벌을 받지 않고 생명의 나라인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 우리를 위하여 천국이 기다리고 있다. 그것은 오늘도 우리에게 맡겨 주신 이 시대의 사명에 충성하는 것이 그 핵심이다. 

 

8. 나오며

  하나님께서 이제 이 우주의 역사를 마감할 시간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음을 많이 느낀다. 지금은 마지막 때인 것이다. 곧 있으면 우리도 결산을 하게 될 날이 불현듯 찾아올 것이다. 그때에 주님은 하늘나라를 맡길 자가 누군지를 고르실 것이다. 그럼, 그때 누가 하늘나라의 기업을 물려받은 자의 반열에 들어가게 되는가? 그것은 기본적으로 회개하고 믿음을 지켜 천국에 들어가는 자들일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그들 중에서 충성된 자들이다. 그들에게 이 땅에서 그들이 열심히 일해서 남긴 분량만큼 상을 안겨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큰 것을 그들에게 맡겨 주실 것이다. 그렇다. 지금의 시기는 사실 하나님이 정하신 때를 따라 주인의 집안 사람들 곧 교회의 성도들에게 양식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려주는 일꾼들이 일하는 시기다. 이 일에 충성하는 자들과  주님께서 함께 할 것이요, 그들에게 능력과 영성과 지도력도 안겨 주실 것이다. 또한 이러한 충성된 일꾼들에게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서도 더 큰 기업을 얻도록 더 도와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천국에서 받을 것은 이 땅에서 우리가 주님께 드린 충성도에 따라 결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고로 우리는 이제 주인의 뜻을 알고 준비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역시 나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들을 맡겨 주시고 그것에 충성하라고 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고로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분량에 최선을 다하면 된다. 이 시대에 우리에게 맡겨 주신 사명에 충실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다 눈이 될 수는 없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어떤 사람은 귀가 되어야 하고 어떤 사람은 손과 발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수행해야 한다. 그러면 그날 주님으로부터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여"라는 말을 듣게 될 것이다. 그날을 위해 지금부터라도 다시 시작해 보자. 

 

 

2023년 01월 08일(주일)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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