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강해(04)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예수님은 과연 누구신가?(02)(계1:9~20)_2017-07-19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머릿말에 나오는 은혜와 평강에 대한 기원을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본다. 하지만 헬라어 원문을 보면 그렇게 나와 있지 않다. 거기에는 하나님이 누구신지와 그분이 이 땅에 보낸 영인 성령이 역할과 인성을 입으시고 일하셨던 예수님이 누구시며 그분이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말씀하고 있다. 그런데 이 다음 부분(계1:9~20)에 나오는 말씀이 사뭇 의미심장하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인자같은 이 곧 천상에 계신 신성한 그리스도의 모습이 나오고 그분의 선언이 나오기 때문이다. 대체 하나님으로서 예수님은 어떤 모습이었으며, 그분은 자신을 자신을 어떻게 말씀하셨을까? 오늘은 그것에 대해 알아보자.
1. 들어가며
우리는 지난주 수요일에 요한계시록 1:4~8을 통해서, 하나님은 누구시며, 그분의 영인 성령과 인성을 지니셨던 예수님은 누구시며 또한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배웠다. 오늘 이 시간에는 신성을 지니신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해 함깨 말씀을 나누고자 한다.
2. 부활승천하신 예수님을 우리는 제대로 알고 있을까?
많은 그리스도인은 인성을 취하셨던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안다고 하지는 잘 모른다. 그냥 그분이 메시야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로 생각한다. 하지만 인성을 취하시전 그분은 어떤 분이셨는지 그리고 인성을 통과하여 죽음을 극복하신 후 부활승천하신 예수께서는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래도 말씀을 알고 있다는 하는 이들 중에는 예수께서 인성을 입으시기 전에는 말씀으로 선재해 계셨으며,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예수님이 되셨다고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분이 죽고 부활하신 후에는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신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요한계시록을 보기 전의 예수님 그러니까 부활승천하신 예수님을 보기 전에,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에 대해 알고 있는 것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통해서, 성육신하기 이전 예수님은 과연 어떤 상태로 존재했으며, 부활승천후에는 또한 어떤 상태에 계시는지 그리고 하늘에서 무슨 일을 하고 계시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에 미래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 알기 전에, 그보다 먼저 요한계시록에서 증거하고 있는 예수님이 과연 누구신지를 알고 배울 수 있기를 바란다. 미래에 일어날 일은 잘 몰라고 천국가는 데에 지장이 없지만,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잘 모르면, 잘못 전달된 하나님을 알다가, 이단에 빠질 수도 있고, 하나님의 아닌 것을 하나님으로 평생 섬기는 어리석음을 범할 수도 있다. 그렇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누구신지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하나님이 아닌 것들을 하나님으로 섬기면 되겠으며, 심지어 귀신들에게 속아서 귀신들을 하나님의 영 곧 성령으로 섬기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래서 오늘은 천상에 계시는 예수께서 어떤 상태로 계시는지, 어떤 모습을 취하고 계시는지, 그분이 자신을 무엇이라고 소개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3. 요한계시록을 구분해 보자.
요한계시록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편지형식으로 볼 때, 머릿말(1:1~8)과 본론(계1:9~22:5)과 나오는 말(계22:6~21)로 나눌 수 있다. 그리고 계1:19의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사도요한이 본 것들(1장)과 지금 있는 일들(2~3장)과 장차 될 일들(4~22장)으로도 나누어 볼 수 있다. 오늘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부분은 계1:9~20의 말씀으로서, 본론부의 시작이자, 사도요한이 본 것들 중에 일곱금촛대들 사이에 거리시는 인자같은 이신 예수님에 대한 말씀이다.
어떤 이에 의하면 요한계시록은 3번의 시작이 있다고 한다. 첫번째는 계1:1~3의 말씀이며, 두번째는 계1:4~8이며, 세번째는 계1:9~20이라고 한다. 어느정도 일리가 있는 주장같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살펴볼 말씀은 계1:9~20의 말씀으로서, 세번째 시작에 해당한다. 사도요한에게 편지를 쓰라고 명령하신 그분이 천상에서 어떤 상태로 계시는지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4. 사도요한은 인자같은 이인 예수님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보았을까?
사도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로 인하여 밧모섬에 갇혀 있게 되었다(계:1:9). 즉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을 섬기는 것은 다 우상숭배이며, 예수님이 바로 주님이요 하나님이라는 신앙고백을 하였던 사도요한은 로마의 열한번째 황제였던 도미시안(A.D.81~96) 왕에 의해, 모진 박해를 받아야했다. 도미시안황제는 마침내 그를 죽이기 위해 끓는 기름가마에 집어넣었다 하지만 아무 이상이 없었다. 그러자 황제는 그를 밧모섬에 귀양보내버렸다. 그러므로 사도요한은 자신을 예수의 인내와 왕국 그리고 예수의 환난에 동참하는 자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그렇다. 누가 과연 천국에 계신 예수님을 만나 볼 수 있을까? 누가 과연 예수님이 계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까? 그것은 예수님 때문에 받게 되는 고난들을 이겨내고, 천국을 바라보는 자이다. 그런데 그가 주님께 속한 날 곧 주일에 영 안에 있게 된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듣게 된다(계1:10). 그래서 그 음성이 무엇인지를 알아보려고 뒤로 돌이킬 때에 그는 불타고 있는 일곱금촛대를 보았고, 거기에서 운행하고 계시는 인자같은 이 곧 예수님을 보게 된다(계1:12~13).
5. 천상에 계신 예수님은 어떤 모습인가?
그렇다면, 천상에 계시는 예수님은 어떤 상태로 계셨을까? 천상에 계시는 그분은이 과연 어떤 모습을 취하고 계셨으며, 천상에서 그분은 대체 어떤 분이신가? 먼저, 천상에 계시는 그분의 모습부터 살펴보자. 그것은 계1:13~16절에 나온다. 천상에 계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그분은 인자와 아들과 닮아보였다(13절). 이것은 그분이 한 때 사람을 취하시고 자신을 아들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둘째, 일곱금촛대 사이에서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있었다(13절). 이것은 예수께서 구약시대로 치자면, 성막의 성소에서 일하시는 제사장으로 사역하고 계심을 의미한다. 성막의 성소에는 당시 일곱금촛대가 있었고, 분향단이 있었고, 떡상이 있었다. 여기에 등장하는 일곱 금 촛대 사이의 기름등불은 성령을 상징한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 이미 속죄사역을 완성하시고 천국에 가 계신다. 하지만 예수님은 천국에서 쉬는 것이 아니다. 지구가 운명이 끝나는 그날까지, 믿는 이들인 교회에게 성령을 충만히 공급하시는 분으로 활동하고 계신다. 그리고 더불어 제사장이 분향단에 향을 사르는 것처럼, 중보기도를 하고 계시며, 제사장들이 안식일마다 떡상에 진설하는 것처럼 말씀을 주의 종들에게 공급해주시고 있는 것이다. 셋째, 가슴에 금띠를 띠고 있었다(13절). 이는 그분이 왕으로서 사역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넷째,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았다(14절). 이것은 그분이 거룩하심과 깨끗하심과 오래되셨음을 말해주는데, 이 표현은 구약시대에 다니엘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모습 곧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로서 여호와 하나님의 모습과 정확히 일치한다(단7:9). 다섯째, 그분의 눈을 불꽃같았다(14절). 이는 그분이 이 땅에 보내신 일곱 영인 성령으로 인하여 모든 것을 감찰하고 계심을 말해준다. 그분은 이 세상의 일을 못 아실 것이 없으시다. 여섯째,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았다(15절). 이것은 그분께서 심판주로서 잘못한 이들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으깨버리시는 엄위하신 분임을 말해준다. 그렇다. 예수님은 재림이전까지는 긍휼이 많으시고, 기다려주시고, 참아주시는 분이다. 한 사람이라도 더 회개하고 구원받도록 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그분이 재림하실 때에는 더이상 용서가 없다. 악을 심판하셔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회개하려면 지금 회개하라. 그래서 그날 긍휼을 입을 수가 있다. 일곱째, 그분의 음성을 많은 물소리와 같았다(15절). 그분의 매우 근엄하시고 엄위하신 분이심을 말해준다. 여덟째, 그의 오른 손에는 일곱별을 가지고 계셨다(16절). 그렇다면 그분이 쥐고 있던 일곱별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인가? 그것은 20절에 나와 있다. 20절에 보면, 일곱금촛대는 일곱교회를 상징하며, 일곱별은 입곱교회의 사자 곧 일곱교회에서 예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전달자들을 의미한다고 하셨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예수께서 천상에 계시지만 가장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일곱금촛대 곧 세상에 있는 교회들이며, 그분이 붙들고 있는 이는 일곱별 곧 일곱교회의 말씀전달자들인 것이다. 그렇다. 주님은 말씀전달자를 붙들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말씀을 잘못 전달하는 자를 예수님은 결코 용서치 아니하신다. 더 큰 심판으로 진노하신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교회선택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말씀전달자인 것을 알아야 한다. 아홉째, 그의 입에서는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있었다(16절). 그 검으로 잘못 행하고 있는 자를 검으로 베어버리시겠다는 뜻이다. 열째, 그의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았다(16절). 이것은 예수께서 근원적인 빛이신 것을 말해준다. 사실 예수께서도 공생애의 마지막 부분에 가서 한 번 자신의 영광을 3명의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적이 있다. 변화산이다. 그때 예수께서는 변형되사 그의 얼굴이 해같이 빛나고 있었고, 그이 옷은 빛과 같이 희어진 적이 있었다(마17:2~3). 그때 예수님이 우원래 누구신지를 3명의 제자들이 잠깐 볼 수 있었다. 그것은 그분이 빛이신 하나님이신 것을 보게 된 것이다. 사실 천국에 있는 사람들을 이 땅에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불러낼 수 업다. 그러나 곧바로 베드로가 실수하고 말았다.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동일선상에 놓고 경배하려 시도한 것이다. 그러자 갑자기 구름이 와서 그들을 가리더니 예수님만 남고 그 둘은 사라지고 없었으며, 음성이 나기를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했다. 이는 감히 인간인 모세와 엘리야를 하나님이신 예수님과 비교하지 말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 우리는 인간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속량하기 위해 한 때 사람이 되시기는 했다. 하지만 그분은 원래 한 분 하나님으로 계셨다가 육신을 입고 아들로 이 세상에 들어온 것이다. 그리고 속죄사역을 완성하시자 하늘로 올라가셔서 원래대로 복귀하셨다. 하나님으로 복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밧모섬에서 사도요한에게 나타났던 예수님은 해가 힘있게 비추는 빛과 같았던 것이다.
6. 천상에 계신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무엇이라고 소개했을까?
그리고, 둘째로 천상에 계시는 예수님은 사도요한에게 당신 자신을 무엇이라고 소개하셨을까? 그것은 1:17~18절에 나온다. 사실 그날 사도요한은 예수님을 보았을 때, 천상에 계신 하나님을 본 것이다. 그러자 사도요한은 그분의 발 앞에 엎드러질 수밖에 없었고, 죽은 자 같이 될수밖에 없었다. 마치 사6장에서 이사야가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는 순간 자신에게 화가 미치게 되었으므로 자신은 죽게 생겼다고 탄식한 것과 비슷하다. 하지만 주님은 그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다음, 당신이 누구신지를 소개하셨다. 그것은 "나는 ~이다"라는 하나님의 자기선언이었다. 이때 예수님은 자신을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고 하셨다. 이것은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구약시대에 자신을 소개하신 것과 똑같은 표현이다(사41:4, 44:6, 48:12). 곧 예수님이 한 분 하나님이심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당신은 현재 살아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는 존재라고 하셨다(18절). 그리고 이어서 그분은 현재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고 하셨다(18절).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자같은 이이신 예수께서 사도요한에게 명령하신 내용이 뒤를 따라 나오는데(계1:19~20), 그것은 그가 본 것들(1장)과 이제 있는 일들(2~3장)과 장차 될 일들(4~22장)을 단 번에 기록하여, 그것을 일곱교회의 사자에게 보내라는 것이었다.
7. 나오며
지금까지 우리는 천상에 계신 예수님이 어떤 모습으로 계시는지와 그분 자신이 누구신지를 배웠다. 이러한 소개는 앞으로 있는 소아시아 일곱교회를 돌보시는 주님의 모습과 일치한다. 다만 어떤 모습들이 특정한 교회에 강조되고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서, 두아디라교회에게 편지를 쓰라고 하셨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당신자신을 "그의 눈이 불꽃같고, 그의 발이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과 같다"고 하셨다. 그렇다. 주님의 모습은 당시 특정 교회의 어떤 형편과 잇대어 있었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우리 주님의 최대의 관심사는 교회공동체이고, 더 나아가서는 교회 말씀전달자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우리가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를 세우며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일을 한다는 것은 곧 교회의 목회자가 말씀전달자로서 충분히 사역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건투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