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강해(01)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주 하나님은 과연 누구신가(01)(계1:1~8)_2017-06-28
요한계시록은 종말에 일어날 일들을 다루고 있는 미밀스런 계시와 예언의 책이다. 그렇지만 성경구성으로 볼 때 이 책은 결론의 책이요 완성의 책이다. 여기에 나온 것 이외 더 이상의 계시가 필요치 않으며, 예언이 필요하지도 않음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에서는 하나님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을까? 출6:2~3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는 오직 전능한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며, 모세에게 비로소 자신의 이름을 여호와로 계시했다고 나온다. 그리고 이사야에서 가서는 여호와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은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완성의 책인 요한계시록에서는 주 하나님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으며, 그분과 예수님의 관계는 어떻다고 말씀하고 있을까? 이제 결론의 책 안으로 들어가보자.
1. 들어가며
요한계시록은 사실 읽기도 어렵고 해석하기도 까다롭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라도 요한계시록을 대하는 것은 그리 편하지 않다. 요한계시록의 거의 70%나 되는 분량이 상징이나 이미지로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성경책은 그동안 수많은 이단들이 이용해왔다. 대부분의 이단들이 요한계시록을 이용해 자기들의 종말론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을 잘못 접했다가는 혹시 이단에 빠지지 않을까 하는 불안한 심리마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영영 요한계시록을 덮어버려야 하는가? 그럴 수는 없다. 왜냐하면 사도요한이 이 요한계시록을 쓰면서 7가지 복을 말했는데, 첫번째 복있는 자가 바로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들을 지키는 자들이라고 했기 때문이다(계1:3). 그러므로 제대로 된 가르침을 받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읽고 또 듣기를 힘써야 한다.
2. 요한계시록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가 받게 될 복은 어떤 것인가?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보는 것이 좋을까? 그리고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적용하는 것이 좋을까? 이것을 해결하기는 결코 쉽지 않는 작업이다. 그래도 우리는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읽고 듣고 실천해야 한다. 그래서 복 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을 접하는 자가 받게 될 복은 무엇인가? 그것은 약 열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첫째, 요한계시록을 통해 종말에 있을 일들을 예수님의 계시를 통해 알 수 있다는 점이다. 둘째, 교회들을 향한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다는 점이다. 셋째, 인을 떼시는 어린양의 모습을 통해 인간역사의 진정한 주관자가 우리 주 예수님이신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넷째, 천국생활의 가장 큰 본질은 곧 찬양과 경배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섯째, 박해와 환난에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궁극적인 승리는 박해자가 아니라 핍박을 맞서고 이겨낸 그리스도인의 몫이기 때문이다. 여섯째, 세속문명에 대해 성도가 가져야 할 시각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세속문명을 반드시 파멸하게 될 것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곱째, 인류의 원수인 사탄마귀의 최후와 그 결말을 확인해 볼 수 있다는 점이. 그들은 불못이 그들의 운명이다. 여덟째, 만물의 갱신과 새로운 세계 곧 새 하늘과 새 땅이 어떤 곳인지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다. 아홉째, 고난을 이긴 성도들이 받을 상급을 알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위로받고 충성하고 목숨까지 내놓을 수가 있다. 열째, 주의 재림을 고대하는 성도들의 합당한 생활이 무엇인지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제대로 읽고 해석하여 우리의 생활에 적용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이와같은 열가지 혜택 외에도 더 많은 영적인 유익을 얻게 될 것이다.
3. 요한계시록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
오늘은 요한계시록 강해 첫 시간이니만큼 요한계시록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부터 하고 가보자.
첫째, 요한계시록의 저자는 누구인가? 이는 예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제자였던 사도요한이다(계1:1,4,,9,22:8).
둘째, 이 책의 저작시기는 언제인가? 이 책은 로마 제10대 황제였던 도미티아누스(도미시안) 황제 통치(A.D.81~96)이자, 요한이 밧모섬에 갇혀 있었던 시기인 A.D.95~96년경으로 보인다(계1:9).
셋째, 이 책은 어떤 책으로 분류할 수 있는가? 이 책은 형식상으로는 계시(묵시)와 예언과 서신의 책으로 분류할 수 있으며, 내용상으로는 위로와 소망의 책이자, 완성과 결론의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형식상으로 볼 때, 요한은 이 책의 서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기록하고 있으며(계1:1), 이 책이 바로 "예언의 말씀"인 것을 수차례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계1:3, 22:7,10,18~19). 또한 이 책이 사도요한이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교회에게 보내는 회람서신이기 때문이다(계1:4,9). 특별히 이 책은 내용상 위로와 소망을 주는 책이다. 왜냐하면 주님의 재림은 지연자 로마의 양대 박해자였던 네로황제와 도미시안황제 때에 수많은 그리스도들이 하나씩 하나씩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책은 몸은 죽여도 영혼을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할 수 있는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책은 신구약 66권 중에 제일 마지막에 기록된 책으로서, 이 책의 내용이 역사의 끝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이 책은 신구약성경의 완결판이자 결론의 책인 것이다.
넷째, 그럼 이 책은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요한계시록을 서신서로 본다면, 1:1~8까지는 머릿말에 해당되며, 1:9~22:5까지는 본론부(내용)에 해당되며, 22:6~21까지가 끝맺는 말에 해당한다. 그리고 다시 본론부는 계1:19의 기준에 따라, "본 것"은 계1:9~20까지요, "이제 있는 일"은 계2~3장이며, "장차 될 일"은 계4~22:5이라고 할 수 있다.
4. 예수님으로부터 요한에게 계시가 주어진 순서와 과정
사도요한은 맨 처음에 이 책이 계시의 책인 것을 소개한다(계1:1). 특별히 사도요한은 이 책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계시의 책인 것을 말한다(계1:1~2). 그렇다. 요한계시록은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하신 말씀(계1:8, 6:11, 21:5)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보여주신 계시를 기록한 책이다. 이 계시는 4단계를 거쳐 사도요한에게까지 전달되었다. 먼저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달되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천사에게 주었으며, 또한 그의 천사는 이 계시를 사도요한에게 주었던 것이다(계1:1,22:6).
5. 예수께서 속히 오신다는 말씀의 뜻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예수께서 보여주신 계시는 언제 일어날 일들인가? 사도요한은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이라고 말했다(계1:1). 그런데 올 해는 A.D.95~96년경을 한참 지내 벌써 2017년이 되었다. 정확히 따진다면, 그때로부터 1921~1922년이 지난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 주님의 재림의 시기는 여전히 알 수가 없고 지연되고 있다. 이것을 무엇을 말해주는가? 그것은 주님이 말씀하시는 시간과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이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주님의 시간개념은 어떤가? 사도베드로는 이렇게 말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8~9)"고 했다. 그리고 모세도 시편 90편에서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이라고 했다(시90:4). 그렇다. 주님의 눈으로 본다면, 지금은 그때로부터 단 이틀 지난 것이다. 그럼에도 주의 재림은 왜 이렇게 지연되고 있는가? 그 이유는 단 한 가지다. 이 세상 사람들 중에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하여 구원을 받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계속해서 "속히 오신다"는 말씀을 들려주셨다(계2:16,3:11,22:7,12,20). 주님은 그의 때에 갑자기 오실 것이다(계16:15).
특별히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성경책 중에서 상징과 이미지의 최고결정판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는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숫자들과 이미지들이 다 상징적으로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요한계시록의 나용을 상징을 통하여(계1:1) 사도요한에게 알려주셨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죽이는 세력이 로마황제라고 한다면, 로마황제가 그리스도인들을 다 죽일 것이기 때문이다.
6. 요한계시록이 들려주는 진정 복있는 자는 누구인가?
그렇다면, 비록 요한계시록이 상징의 책일지라도 우리는 어떻게 이 성경을 대해야 하는가? 사도요한은 이것을 읽고 들을 것과 그리고 이것을 지킬 것을 권면했다. 그래야 복있는 자가 되기 때문이다.
사실 요한계시록에서는 총7가지 복있는 자가 나온다. 그것을 정리하면 이렇다. 첫째,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들이 복있는 자라고 하였다(게1:8). 둘째, 주 안에서 죽는 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즉 우상숭배하지 않으며, 예수님에 대한 믿음 때문에 핍박을 받다가 순교하는 자가 복있는 자라 하였다(계14:13). 곧 순교자가 복있는 자다. 셋째, 주님이 언제 오실지 모르는데 날마다 깨어있어서 자기의 옷을 지키고 벌거벗지 아니하여 주님이 오실 때에 부끄럽지 않을 자가 복있는 자라고 하였다(계16:15). 넷째,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날,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하는 자들이 복있는 자라고 하였다(계19:9). 그럼 누가 이 잔치에 초대되는가? 두 종류의 사람들이다. 이미 죽어 부활체를 입고 천국에 들어가 왕노릇하다가 주님과 함께 공중으로 오는 자들과 및 주님의 재림의 때까지 신앙을 지키다가 죽거나 살아서 주님의 얼굴을 보게되는 자들이다. 다섯째, 첫째부활에 참여하는 자라고 하였다(계20:6). 여기서 첫째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이란 믿는 이들 가운데 주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죽어서 부활체를 입고 천국에 들어가서 왕노릇하고 있는 자들이다. 나중에 알게 되겠지만 천년왕국은 결코 지상에서 펼쳐지지 않을 것이다. 여섯째, 두루마리에 기록된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지키는 자들이 복있는 자라고 하였다(계22:7). 이것은 첫번째 복을 다시 한 번 반복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만큼 말씀을 지키는 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끝까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인내하는 자가 많지 않을 것임을 시사한다. 마지막으로 일곱째, 자기의 두루마기를 빠는 자가 복있는 자라고 하였다(계22:14). 죄로 더럽혀진 자기의 두루마기를 빠는 자 곧 자기의 죄를 회개하는 자가 복있는 자인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 예언의 말씀을 전부다 빼놓지 않고 지킬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100퍼센트 그렇게 지킬 수 있는 자는 없다. 그러므로 맨 마지막은 회개하는 자가 복있는 자라고 하셨다. 그렇다. 우상숭배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 회개하는 자가 복있는 자인 것이다.
7. 사도요한이 소개하고 있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이제 사도요한은 서신서의 형식에 따라서 인삿말을 쓴다. 그것이 바로 계1:5~8의 말씀이다. 이때 사도요한은 이 편지의 저자로서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교회에게 편지를 쓴다고 하면서,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으로부터 좇아 은혜와 평강을 그들에게 기원한다(계1:5~5a). 그리고 덧붙혀 예수께서 하신 일을 좀 더 자세히 말씀하면서 그분께 찬양과 영광을 돌린다(계1:5b~6). 오늘은 이것들 중에서 사도요한이 소개하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조금 살펴보고, 구체적인 인삿말의 내용은 다음 주에 살펴보도록 하자.
사도요한은 주 하나님을 어떻게 소개하고 있는가? 요한은 하나님을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라고 소개한다(계1:4).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자기선언이 아니라 사도요한의 해설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에 대해 그렇게 소개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기선언은 요한계시록에서 딱 두 번 나온다. 그것은 바로 계1:8과 계21:6이다. 우선 이 두 구절이 무엇인지부터 살펴보자.
계1:8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헬라어원문은 이 번역과는 약간 다르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다.' 주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지금 있으며 전에부터도 있어왔고 지금 오고 계시는 이, 전능한 자이신" )
계21: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계1:8에서 주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고 소개하셨다. 그리고 계21:6에서는 보좌에 앉으신 이가 자기를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고 소개하셨다. 그렇다면 "보좌에 앉으신 이"는 누구일까? 계19:4에서는 그분이 하나님이라고 언급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누구인가를 요한계시록에서 딱 두 번 소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를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이요 마지막이라고 소개하신 그분은 누구인가? 그분은 "주 하나님"(계1:8)이시요, "보좌에 앉으신 이"(계19:4)이시다.
그런데 요한계시록과 더불어 이사야서에서 예수님의 자기선언과 여호와의 자기선언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일단 이사야서에는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는 여호와의 자기선언은 나오지 않는다. 물론 "알파와 오메가"는 "처음과 마지막"와 동일한 의미요, "시작과 마침"과도 동일한 의미이지 말이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다"라는 하나님의 자기선언은 오직 요한계시록에만 나온다.
그렇다면 구약성경 중 이사야서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자기를 누구라고 선언하셨을까? 그것은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라"라고하셨다. 그것도 무려 세 번씩이나 나온다(사41:4, 44:6, 48:12). 그랬는데 놀랍게도 요한계시록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인자같으신 이이신 예수님께서 자기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라"고 말씀하고 있다(계1:17~18,22:13).
계1:17-18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인자같은 이, 하나님의 아들)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곧 살아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보라 이제 내가 세세토록 살아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계22:13 나(예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이 말씀을 종합해보면, 예수님은 구약의 여호와이든지 아니면 예수님은 구약의 여호와를 사칭하는 사기꾼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진짜 여호와인지 아니면 사기꾼인지를 이사야선지자는 이렇게 확인해준다.
사44:6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원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
그렇다. 구약에 여호와만이 "처음이요 마지막"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또다시 "나 외에는 다른 신이 없다"고 하셨다. 이것은 예수께서 한 분이신 하나님으로서 구약에 나타난 여호와이심을 알 수 있다. 만약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따로 있고 아들이 따로 있다라고 한다면, 나 외에도 아들이 있다고 말했어야 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는 다른 신은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그분이 구약시대에는 여호와로 자신을 계시하셨고,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으로 계시하신 것이다. 더욱 더 이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에 그분과 함께 한 이 없이 홀로 창조하셨다고 말씀하신다는 사실이다(사44:24).
사44:24 네 구속자요 모태에서 너를 지은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홀로 하늘을 폈으며 나와 함께 한 자 없이 땅을 펼쳤고
8.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
그렇다. 우리가 그동안 듣기에는 여호와(아버지)께서 아들과 함께 그리고 성령님과 함께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다고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다고 말하지 않는다. 여호와께서 홀로 창조하셨고 그와 함께 한 이가 없이 오직 홀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다고 한다(사44:24). 결국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그분 홀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리고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구약의 여호와로 나타나셨음을 말해준다. 그러다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아들의 신분을 입으신 것이다(딤전3:16). 그분이 곧 예수님이시다. 그분이 한 분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새 하늘과 새 땅에 도래했을 때에, 예수께서는 자신을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이요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계22:13)"라고 선언하신다. 나 예수가 여호와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또한 사도요한은 천국에서 하나님의 보좌는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라고 말한다. 그 한 개의 보좌가 한 분 하나님의 보좌이기 때문이다(계22;1,3).
또한 하나님이 한 분이신 것은 사도요한이 말하는 하나님 소개에서 더욱 확증된다. 사도요한은 하나님을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라고 했다(계1:1:4,8). 이 말씀은 하나님이 역시 한 분이신 것을 그대로 말해준다. 왜냐하면 이 말씀을 헬라어원어로 보면, "지금도 있고(현재,분사,능동태), 전부터도 계속해서 있어왔으며(직설법,미완료,능동태), 지금도 자기를 위하여 오고 계시는 이(분사,현재,중간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그러나 하나님을 세 분으로 믿으려 하는 자는 "이제도 계신" 분은 성령님이라고 하고, "전에 계신" 분은 여호와이시며, "장차 오실 이"는 예수님이실 것이라고 해석하곤 한다. 그러나 이들도 하나님은 결코 세 분이 아니라 한 분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도요한이 말했던 하나님에 대한 소개는 그러한 뜻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존재하고 있지만, 과거에서부터 계속해서 존재해 왔고 앞으로도 존재할 것인데, 그분은 지금도 자기자신을 위하여 오고 계시는 분으로서 한 분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그렇다. 태초부터 한 분 하나님이 계신 것이다. 그분이 구약시대에는 여호와로 나타나셨고, 신약시대에는 아들의 신분으로 오셔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계시하셨다. 그리고 예수께서 부활승천하신 뒤에는 보혜사 성령 곧 하나님의 영이자 예수의 영 곧 자기의 영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만세전부터 한 분으로 계시며, 지금도 그렇게 계시고 있고, 앞으로도 그렇게 계시다는 것이 성경적인 증언이다. 하나님을 세 분으로 나누려는 자들은 하나님은 만세전부터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계셨으며, 구약시대에는 성부가 여호와로 나타나 활동하셨고, 신약시대에는 성자께서 사람이 되어 오셔서 활동하셨으며, 오순절성령강림이후에는 성령께서 오셔서 지금까지 활동하고 계신다는 가르친다. 하지만 이것은 성경적인 견해가 아니다. 만세전부터 한 분으로 존재하신 하나님께서 구약에서는 여호와로 자신을 계시하셨지만, 인류의 구원을 위해 사람의 육신을 취하여 아들의 신분으로 이 세상에 들어오신 것이다. 그리고 속죄사역을 완성하신 후에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께서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신 것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신 특징 때문에, 하늘에 아버지로도 계시고, 땅에서는 동시에 아들로도 계실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성령님을 이 세상에 파송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동시존재가 가능하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영이신 하나님 곧 피와 살이 없으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육신을 입고 오셔야 했던 것일까? 그것은 오직 한 가지 이유에서다. 피흘려 죽기 위해서다(히9:22). 피흘림이 없다면 인류의 죄를 사해줄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사야선지자는 메시야에 대해 이렇게 예언했다. 그분은 "아기이자 아들로 오실 분이지만, 그분은 위대한 보혜사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요, 평강의 왕이시다(사9:6)". 놀랍게도 삼위일체를 그렇게 강력하게 주장하던 칼빈도 그의 책 <기독교강요>에서 예수님이 바로 여호와인 것을 기록하고 있다(칼빈의 기독교강요 제1권 제13장 11절).
그렇다. 구약에서는 여호와께서 자신을 "처음이요 마지막"이라고 하셨다(사41:4,44:6,48:12,계21:6). 그런데 신약에서는 예수께서 자신을 "처음이요 마지막"이라고 하셨다(계1:17,2:8,22;13). 그러므로 구약시대에는 여호와로 자신을 계시하신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아들이신 예수님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두 분 다 "나는 처음으로 마지막이다"고 선언하신 것이다. 한 분 하나님이니까 그렇게 말씀하실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음주에 좀 더 자세히 다루겠지만, 재림하시는 이가 구약시대에는 천하의 왕이신 여호와이시다(슥14:3-5,9). 그런데 요한계시록 맨 마지막 부분에서는 다시 오실 하나님은 주 예수님이라고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계22:20).
9. 삼위일체의 하나님과 양태론의 하나님, 무엇이 문제인가?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 교리는 우리가 체험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표현해주는 아주 특별한 용어다. 하지만 이 말은 하나님을 세 분으로 볼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양태론은 하나님을 한 분으로만 볼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어떤가? 그것은 무소부재하신 한 분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다. 동시존재하시는 한 분 하나님을 믿는 자는 하나님을 한 분이시나 동시에 세 분으로도 존재하실 수 있으며, 세 분으로 활동하신 것을 이해할 수 있다.
10. 나오며
요한계시록은 정말 놀라운 책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사도요한에게 보여주셨고 들려주신 종말의 일들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는 일들을 어떻게 실제광경처럼 표현할 수 있었을까? 오직 알파이자 오메가이시며, 처음이요 마지막이신 하나님만이 보여주실 수가 있고 들려줄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도 알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은 만세전부터 한 분으로 계셨다. 그리고 지금도 한 분으로 계신다. 하지만 성경은 그분이 전능자로서 동시존재가 가능하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라고 가르쳐준다. 그러므로 인류의 구원을 위해 그분은 오늘날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서 각각 따로 일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한 분이시다.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신약시대 이후 세 분으로 사역하고 계신 것에 대해 감사드린다.